세계여행 에세이: 그리스 아테네 (2화)
앞서, 익숙한 듯 낯선 나라 그리스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의 단편 몇 가지와 현대 그리스 정서의 근저를 이루는 문화적 특징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았으니, 이제부터 아테네를 본격 탐방해 보려 한다.
아크로폴리스... 찬란했던 고대문명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리스어로 '높은'을 뜻하는 아크로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가 합쳐진 아크로폴리스. 이곳이 그리스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나 신화(Myths) 그리고 고대 그리스가 남겨 놓은 유산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Journey through Time이자 누가 뭐래도 그리스를 찾아가는 목적의 최고봉일 것이다.
2016년 12월 29일 겨울비 추적추적 내리는 아크로폴리스를 가족과 함께 찾은 후 7년이 지난 2023년 10월 28일. 마침 이날 아크로폴리스를 무료 개방한다길래 호텔에서 잡아탄 택시 기사분께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냐고 물었더니,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내놓으라고 겁박했을 때 그리스가 용감하게 "No"라고 외친 날이요, 이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라고 한다. 바로 오히 (Όχι) Day이다.
오히는 ‘No', '안돼’라는 뜻이다. 택시 기사의 자긍심 넘치는 설명대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10월 28일 새벽 3시에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가 그리스 주재 자국 대사를 통해 이탈리아 군대가 그리스에 진입할 터이니 허용하라는 통첩을 보내오자 그리스 지도자 메타크사스는 즉각 '오히'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날 새벽 5시 30분 그리스를 침략하여 점령해 버리지만 어쨌든 외세의 겁박에 오히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그리스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오히의 날을 통해 매년 국민들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기 전에 마치 정해진 식순을 따르는 것처럼 아크로폴리스를 느긋하게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에 위치한 Dionysos Zonar's를 찾아 차가운 아이스커피 한 잔을 주문해 본다.
Dionysos Zonar's 레스토랑 바로 가까이 필로파포스 언덕을 오르는 오솔길 옆으로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이라며 가수 나훈아 씨가 애타는 감정으로 찾아 부르던 바로 소크라테스의 감옥을 찾아 길을 걷는다. 10월 말인데도 마치 산토리니의 푸른 돔과 같은 빛깔의 하늘에서는 햇빛이 내리쬐고 햇살은 따가워 등으로 땀이 흐른다.
한겨레신문이 서울대 김헌 교수가 집필한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을 소개하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저물어간 아테네 - 아테나 여신의 찬란한 도시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울고, 독배 든 현인은 철학의 완성을 위해 육체 감옥에서 벗어나다]라고 심오한 타이틀을 뽑았다.
파르테논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말하겠지만,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테네가 혼란에 빠졌던 그 시기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이상한 신들을 소개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도망가라는 조언도 무시하고 재판과정에서 자비를 구하지도 않은 채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관련하여 "죽음을 피하기보다 비열함을 피하기가 어렵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들은 살러 가지만,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주 인용되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은 한 적이 없고, 일본학자가 만들어 낸 말이란다.)
고대 아고라, 그리고 수블라키 또는 케밥
아크로폴리스에 앞서 아레이오스 파고스에 먼저 오른다.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을 뜻하는데, 신화에서는 흑해 연안의 여전사들인 아마조네스(Amazon)가 자신들의 여왕인 안티오페를 납치해 간 테세우스를 추격하여 아테네까지 쳐들어 왔을 때 승리를 기원하며 아레스에게 바친 언덕이기도 하고, 아레스 자신이 포세이돈의 아들을 죽이고 신들에게 재판을 받은 장소라고도 하며, 사도 바울이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고, 고대에는 살인죄를 다루는 고등법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모르고 언덕을 올라간다면 그저 아크로폴리스가 잘 보이는 전망대로만 알 노릇이다.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내려와 아크로폴리스 오르기는 뒤로 미루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상반신은 사람이요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한 판(Pan) 신을 모티브로 한 (민망한) 19금 수비니어를 버젓이 내놓고 팔고 있는 기념품 상점을 둘러보는 재미에 잠시 빠져본다. 그리고는 플라카(Plaka) 동네의 멋진 가옥들 사이로 언덕배기의 골목길을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서 이윽고 아테네 고대 아고라(Agora) 유적지에 다다른다.
기념품 말이 나왔으니, 그리스 기념품 상점에서는 19금 수비니어만큼이나 흔하게 악마의 눈(Evil Eye) 액세서리를 볼 수 있다. 마티(Mati)라고 부르는 이 악마의 푸른 눈 속에 가둬놓은 힘 센 악마가 온갖 잡스런 불행을 막아주리라 믿어서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나 할까)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 같은데 걸어두기도 한다는데, 튀르키예에 가보면 거기서도 똑같이 생긴 것을 살 수 있고 그곳에서의 이름은 '나자르 본주'다.
고대 아고라는,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시민들이 모여 정보도 나누고, 연설도 하고, 총회도 하고, 종교활동도 하고, 경제활동도 한 광장이자 인간이 만든 최초의 열린 공간으로서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었다고 하겠다. 아고라 유적지에는 그나마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축소판 같은 헤파이스토스 신전도 있고, 로마 하드리아누스(Hadrian) 황제 통치 때 건립한 도서관도 남아있고, 그 옆으로는 비록 공터에 기둥과 탑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로마시대 때 그리스의 아고라와 똑같은 기능을 한 포럼(Roman Forum) 유적도 볼 수 있다. 아고라, 포럼 둘 다 현대에도 널리 사용되는 익숙한 단어들인데 그 의미가 그러하다.
고대 아고라 유적지를 벗어난다 싶으면 먹을 것, 살 것, 볼 것 많은 모나스티라키로 들어간 것이고, 이것저것 구경하다 광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국인을 포함한 여행자 사이에 꽤나 유명한 그리고 호불호도 나뉘는 케밥과 수블라키 맛집 타나시스(O Thanasis)를 만날 수 있다. 점심때인데 야외 테이블은 이미 꽉 차 있어서 길에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서빙하는 친구가 와서 얇은 비닐부터 테이블 위에 쫙 까는 것을 보면 이건 뭐 여느 한국 관광지 식당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되너(Döner) 케밥이든 쉬쉬 케밥이든 종류를 구분은 잘 못해도 케밥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고, 다들 케밥 하면 튀르키예를 떠올리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중동 국가들의 샤와르마, 그리고 브라질의 슈하스코와 같은 비슷비슷한 음식들이 각자 유명하기도 하지만, 케밥으로 돌아가서, 많은 한국 관광객이 타나시스 식당을 방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를 찾는 사람이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바로 수블라키(Souvalaki)와 이로스(Gyros, 기로스)가 아닐까.
그리스의 수블라키는 주로 양념된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를 꼬치에 꽂아서 야키도리처럼 그릴에 구운 것이다. 튀르키예의 쉬쉬 케밥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튀르키예와 달리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이런 방식 요리는 케밥과 구분되어 그냥 수블라키로 불리고, 잘게 간 양고기를 반죽해서 꼬치에 꿰어 구운 것은 그리스 사람들도 그냥 케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수블라키를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적부터 내려오는 전통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튀르키예 사람들은 쉬쉬 케밥의 영향을 받아 근대에 만들어진 요리라고 생각해서 두 나라 간 큰 생각의 차이가 있다.
타나시스에서는 케밥, 돼지고기와 닭고기 수블라키, 그리고 Greek Salad를 주문해 로컬 맥주 Mythos(미토스)와 같이 먹어보니 원래 양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일까 케밥을 빼곤 전부 다 만족스러웠다. (불친절하단 후기도 여럿 보이던데, 그다지 친절하지도 또 불친절하지도 않은 듯하다.)
케밥이든 수블라키든 납작한 피타(Pita) 빵을 아래에 깔고 그 위에 고기를 올리는데 고기의 양념과 기름기가 빵에 스며들어 있어서 빵을 떼어먹는 맛도 좋다. 이런 빵을 튀르키예에서는 피데(Pide)라고 한다. 난(Naan) 류의 빵은 중동에 살 때 생긴 게 그렇다 하여 다들 걸레빵이라고 불렀는데, 이집트 에이시(Aish), 이라크 탄누르(Tannur), 레반트 쿠브즈(Khubz) 또는 호베즈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긴 해도 '해가 뜨는' 레반트 지역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등)과 '해가 지는' 마그레브 지역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에 두루 걸쳐 널리 먹는 빵이다.
그리스의 이로스(Gyros)와 튀르키예의 되너 케밥 사이에도 두 나라 간 양보 못하는 갈등이 존재한다. 이런 음식의 유사성을 따지자면 이런 것 말고도 터키식 커피라고 부르는 것부터 해서 다양하게 많을 것이다.
우조(Ouzo) 또는 라크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닮은 꼴과 그에 따른 갈등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이번엔 술에 관해서다.
그리스 아테네 1편에서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소개할 때 '우조를 마시는 당신을'이라는 가사가 나왔었다. 그리스에 처음 갔을 때 아크로폴리스가 가까이 보이는 레스토랑 루프탑에서 우조라는 술을 처음 접했다. 중국 바이주(白酒)처럼 무색의 투명한 증류주이자 마찬가지로 40도 정도의 독주인데, 이 술이 재미있는 것은 물을 섞으면 우유 빛깔처럼 뿌옇게 변한다. 당시에는 술 향이 영 취향이 아니어서 그저 특이한 술 정도로만 여기고 기억에서 사라졌었는데, 이번에 수니온 곶(Cape Sounion)의 포세이돈 사원으로 가는 길에 바닷가 해산물 전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온더락으로 마셔본 우조는 뭔가 또 근사한 맛이었다고나 할까. (아테네 시내에서 수니온 곶까지는 차로 1시간 반 정도 소요되고, 현지 여행사가 운영하는 당일치기 패키지 상품으로도 다녀올 수 있다.)
이 신전 유적도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도리아(도리스) 양식의 기둥 어쩌고에만 집중하면 너무 어려워진다. 노을 진 저 바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삼지창 치켜든 포세이돈이 물 위로 솟아오를 것만 같지 않은가.
우조를 두고 내 것을 베꼈다고 볼 멘 소리를 하는 것이 튀르키예의 전통 국민주 라크(Raki)다. 라크도 물과 섞이면 우유 빛깔로 변하는 동일한 특성이 있다. 반대로, 그리스는 우조를 흉내 낸 것이 라크라고 하며 옥신각신 하고 있다. 2013년 당시 튀르키예 총리이던 에르도안이 국가가 국민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세속주의보다는 이슬람 근본(원리)주의에 무게를 두면서 라크로 대표되는 주류 제조를 통제하려다가 국민적 반발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는데, 당시 한 기자가 에르도안을 향해 "라크가 그리스 술이라고 말해라. 그러면 그리스를 싫어하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라크를 거들떠도 안 볼 거다"라고 비꼬자 에르도안이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화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의 바쿠스)가 꽤 비중이 있듯이, 그리스나 튀르키예나 현재도 포도 재배가 성하고 나름 와인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우조와 라크 둘 다 전통적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남은 포도껍질 같은 찌꺼기를 다시 양조하고 증류하여 만드는 과정에서 향신료의 일종인 아니스를 섞다 보니, 아니스 특성상 물과 섞이면 뿌옇게 변하고 숙취를 유발한다고 한다. 튀르키예에서 유명한 Yeni Raki (예니 라크)도 마셔 보았더니 역시나 아니스 향은 내 취향이 아니었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