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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Jan 17. 2023

돌봄과 작업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나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낚여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해 버린 것 같았다, 20년 할부로

_영화 '헤어질 결심'의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


20년 할부로 끝나면 다행이게, 그 후 복리에 복리를 더한다.

만약 알았다면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삶이 시작될 때, 그럼에도 분명 잘 해낼 거라는 나의 오만한 생각이 시간이 거듭될수록 푹 고개 숙인 벼만큼이나 겸손하게 만든다.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돌봄과 작업』이다.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과학기술학 연구자, 아티스트, 미술사 연구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엄마.

이 책에 실린 열한 명의 엄마이자 창작자들은 돌봄과 작업 사이 생존하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고 버텨왔던 그 현장을 날것 그대로 쏟아낸다. 밖에 나가면 누구나 인정해 주는 번듯한 직업일지 모르지만 집에 가면 외출복조차 벗을 시간 없이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기 급급하다. 어쩌면 모두가 잠든 늦은 밤에도 밀린 업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워킹맘이든 전업맘이든 왜 가정의 모든 돌봄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되어야 할까. 제아무리 부당하다 목소리를 높여도 결국 나도 주방 싱크대 앞에 서있고 빨래를 돌리고 집안 환기를 시키며 청소기를 돌린다. 그리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먹을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들 학원 스케줄과 오늘 해야 할 학습지를 정리한다. 입으로 독립적으로 키우겠다,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 가정은 엄마의 몫만이 아니니 가족 모두 분담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몸은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다. 돌봄 맞춤형 로봇으로...


마치 날 못난 엄마처럼 만들어버리는 육아서를 버린 지 오래지만 아이들에게 사소한 문제 하나에도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나 싶어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육아. 그 돌봄이 어느 순간 일보다 우선이 되면서 나의 작업은 점점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중단하고 짬 내서 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전환했다.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나의 작업들은 이젠 짬 내서 하는 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나이도 직업도 돌봄의 환경도 각각 다르지만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열한 명의 엄마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 현재 엄마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겪고 있고 공감할 것이다 그중 내 자리, 내 공간은 로망일까, 어쩌면 출산은 공간뿐만 아니라 '나'라는 경계 자체를 허무는 경험이라는 아티스트 전유진의 말에 깊은 공감이 갔다. 아이를 낳기 전 장비들이 즐비했던 나의 작업 공간은 이젠 그 어디에도 없고, 디자이너 정지은이 아닌 누구누구 엄마로 불린다. 누가 쓰고 남은 공간, 그 자투리 공간을 빌려 쓰는 임차인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누구누구 엄마. 그렇다고 내 작업공간을 만들기에 돈도 시간도 없는, 이제는 정말 로망이 돼버린 거 같다.


한때 내 작업 공간


어쩌다 보니 결혼, 어쩌다 보니 임신과 출산, 어쩌다 보니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20년을 보내오고 있다. 분명 이건 내가 바랐던 삶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어디 계획처럼만 돌아갈까. 분명 그 20년 동안 힘들고 지치고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아쉽고 마음 아픈 건 내 일을 끝까지 잡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고 했는데 이건 내가 너무 손해 보고 협상한 느낌이랄까. 그나마 지금이라도 그 협상 제대로 고쳐보겠다며 나섰지만 이미 흘러 버린 시간과 굳어버린 내 손은 작업대에 쉬이 손을 올려놓지 못하게 한다. 이 나이에 또 한 번 용기와 무모함을 내던져야 한다는 게  참 싫지만 이 책의 그녀들처럼 완벽한 슈퍼맘보다는 정말 좋아하는 내 일, 하고 싶은 내 일, 창조적인 삶을 살아내려 한다.


처음으로 맞이한 목표 없던 올해, 이 책을 계기로 놓아왔던 내 일, 내 작업과 돌봄을 제대로 타협해 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 안 하겠습니다. 제대로 협상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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