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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Mar 15. 2021

내 기억은 1900년인데, 지금이 1999년이라고?

한 시대를 건너온 남자 / 책리뷰 『비행사』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내가 누구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작은 기억 한 조각 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두려웠다.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소리는 멀리서 울리며 낮고 천천히 들린다.

대학교 1학년 불의의 사고로 (나의 부주의로 인해)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병원에 실려갔다.

기절 후 눈을 떴을 때 난 사물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가족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약간의 뇌진탕과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기억은 천천히 돌아올 거라며 가족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며칠, 몇 달 어쩌면 몇 년간의 기억은 완전히 손상될 수 있다는 말에 부모님의 근심은 커졌다.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했을 때 사고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앞뒤 8,9개월 정도의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사고가 났던 것도 그 후 몇 달간의 나의 행동과 말들도 만났던 사람들도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렴풋 떠오르는 기억들은 마치 짙은 안갯속에 갇혀 흐릿하게 보일 듯 말 듯 나를 애타게 만들었다.

(블랙코미디 같았던 단기기억상실증에 관한 나의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겠다.)



여기 단순한 기억 상실을 넘어 한 시대를 건너 깨어난 남자가 있다.

낯선 병원에서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그에게 스스로 기억해 내야 한다며 매일 일기를 쓰게 하는 한 남자, 그는 조금씩 떠오르는 조각난 기억들을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이 1999년이라고? 나의 기억은 1900년인데......

내 기억이 잘 못 된 게 아니라면 난 한 시대를 건너온 것이다.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이자 역사기록인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장편소설 『비행사』 이다.





"깨셨습니까?"

눈을 떴다. 낯선 남자가 침대로 다가와서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가이거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주치의죠."

내가 인노켄티 페트로비치 플라토노프 라고 말하는 그

"정말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습니까?"


깨어난 곳 이름조차 낯선 그

"제 기억이 돌아올까요?"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모든 것은 선생님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생님 스스로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 가이거는 연필과 두꺼운 공책을 인노켄티에게 전하며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과 조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공책에 하나도 빠짐없이 적기 시작한다.


사고가 있었던 건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 낯선 이곳에 있는 걸까?

어쩌면 기억 속에 있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의 기억으로 대체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까지 든다.


매일 매일 서서히 떠오르는 인물들과 장면들 그런데 1906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선생님, 제가 1900년에 태어났나요?"

"네, 선생님은 20세기와 동갑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선생님은 상당히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고, 그동안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저대로 선생님께 조금씩 이야기해드릴 테니,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과거에 선생님한테 일어난 일을 기억해 내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해주세요. 우리의 과제는 저의 이야기와 선생님이 기억해 내는 이야기가 충돌 없이 잘 어울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기억도, 몸의 움직임도 날로 회복되어 가던 인노켄티는 현재 시간과 서서히 조우하며 적응해나기가 시작한다.

하지만 떠오르는 역사 속 악몽의 시간과 사건들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 알고 나면 오히려 불편해질 수도 있고요. 게다가 만약 회상이라는 것들이 삶을 거울처럼 보여준다면 오히려 지루했을 것 같습니다. 회상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회상은 예술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지요."


"만약 제가 제대로 이해하는 거라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지금까지 해동을 해서 다시 살려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사례가 있습니다."

"설마 노랑캐코원숭이인가요?"

가이거는 딱하다는 듯 내 얼굴을 보더니 다소 조심스럽게 말한다.

"선생님 말입니다."



레닌 사후에 냉동인간 문제를 연구하던 연구팀은 솔로베츠키 제도 수용소의 수감자를 실험 대상로 연구에 착수했다.

"만약 당신이 실험 대상이 되기로 결심한다면, 몇 달간 굉장히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될 겁니다. 내 생각에는 죽더라도 배불리 먹고 잘 살다가 가는 편이 낫다고 보는데요. 물론 결정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했다. 결국 실험 대상이 되었다.


반혁명 음모와 살해 혐의로 끌려가 갖은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먹을 거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든 노역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던 그에게 이보다 더한 프러포즈가 있었을까?


내 해동에 대해서 생각하는 지금 나는 내가 잃어버린 수십 년을 돌아보며 나를 해동시키는 것이 한 세대 전체를 해동시킨 것과 같은 것은 아닌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내가 지금 기억해 내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일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내가 살았던 무시무시한 시대에 우리가 겪은 일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기 위해 내가 부활된 것은 아닐까?  -p.394 중-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기억 속 늘 함께하며 그리워했던 그녀

아나스타샤가 살아있다.

1999년 5월 24일 현재 말이다. 아나스타샤가 살아있다.


그녀의 나이는 지금 93살이고, 그의 생물학적 지금 나이는 서른이다. 그가 액체질소 속에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성인이 되었고, 지금은 시들다 못해 노쇠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액체질소 속에 넣어버린 볼셰비키 당원들에 그녀의 삶 전체에 분노하듯 주먹을 쥔 채로 힘겹게 숨을 쉬며 두 눈을 감은 채 아나스타샤가 누워있다.

유일하게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함께하는 그녀가...


과거 고통스러웠던 삶에서 벗어나 희망 가득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그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주인공의 기억 속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고전 문학과 함께 러시아10월 혁명,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시대적 격동과 혁명적 사건을 다룬다. 주요 인물을 통해 섬세하고 세밀한 문장력으로 스토리를 그려내 마치 한 편의 대서사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촘촘히 구성된 일기 형식은 영화 시퀀스 같아 당장 카메라로 찍어도 손색없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초반 요즘 흔한 소재인 타임슬립일거라 생각하며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던 나의 예상을 빗나 냉동인간이라는 고전적인 소재로 반전을 꾀하면서 SF와 추리, 역사와 로맨스 장르를 넘나들며 무한한 상상력과 스토리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과거와 현재 두 시대를 살아가는 인노켄티의 '악이 가진 형태가 다양할 뿐 전 시대를 통틀어 동일했다'라는 말이 시대와 정권이 변해도 권력의 모습은 그대로임을 증명하며 우리는 격동의 역사를 거치며 그토록 원하던 정의를 얻었다 했지만 과연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갖게 만들었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의 일부라는 작가의 말이 와닿으며 그동안 내가 기억하는 나의 이야기와 써 내려갔던 글들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그건 나의 이야기이고 나의 역사였다.

앞으로도 난 나의 이야기, 나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겠다.

당신도 당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길......



"뭘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사물과 감정 등을 묘사하고 있어요. 사람들도요. 요즘 저는 매일 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가 기억하는 것들을 적고 있어요."
"그러기에는 신이 창조한 이 세계가 너무 거대하지 않을까요?"
"각자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이 세계의 일부를 적으면 됩니다. 하긴, 꼭 그 세계의 일부가 작다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요. 넓은 시야는 언제든 확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요?"
"비행사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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