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 가득한 호수 도시 바릴로체에서 미식 탐방하기
지인들에게 '연말연시에 방문했던 곳 중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야?'라고 묻곤 한다. 많은 이들이 뉴욕의 타임스퀘어, 동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혹은 한국과 대비되는 후텁지근한 기후의 동남아 등을 꼽는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겨울 인생 여행지를 꼽으라고 할 때마다, 벌써 방문한 지 사 년이 되어가는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의 눈이 멀 듯 푸르른 호수가 갓 찍은 사진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 아르헨티나, 한국발 직항도 거의 없다시피 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또 비행기를 타고 겨우 들어가 한참 택시를 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소도시 바릴로체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푸르다 못해 시린 빛의 나우엘우아피 호수(Lago Nahuel Huapi)를 마주한 도시 바릴로체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여름 최고의 피서지이자 겨울에는 손꼽히는 스키 관광도시, 그리고 국내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손꼽힌다.
필자가 방문한 1월 기준 남미는 여름이나, 바릴로체의 기온은 영상 10도를 웃돌며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 한낮 기온 40도에 육박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같은 국가에 있음을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길가에는 푸릇한 잔디와 들꽃이 가득하고, 호수 곳곳의 작은 섬들은 빽빽한 침엽수로 뒤덮여 있어 싱그럽고도 촉촉한 느낌을 자아낸다.
푸른 호수와 만년설이 덮인 산들, 그리고 울창한 숲에서 연상할 수 있듯 바릴로체의 별명은 '남미의 스위스'이다. 비단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19세기 말경 스위스 이민자가 대거 정착하며 식문화 및 건축법 등을 도입시킴에 따라, 바릴로체는 동화 속 소도시마냥 포근하고 아기자기한 정취를 풍기는 마을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자연적, 문화적 특성을 지닌 바릴로체인 만큼,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먹거리 역시 풍성하다. 바릴로체에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미식 포인트를 소개한다.
1. 소고기 스테이크(Parilla)
아르헨티나는 '거대한 정육점'이라는 별명을 지닐 만큼 인당 고기 소비율이 어마어마한 국가이다. 이는 남한 영토의 6배에 달하는 평원인 팜파스(Pampas)가 국가 면적의 1/5 가량을 차지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자유롭게 뛰놀며 건강하게 자란 소와 양이 믿기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시장에 유통되기 때문이다.
바릴로체에는 El Boliche de Alberto, Alto el Fuego 등 유명 스테이크 하우스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비해 월등히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소고기를 맛볼 수 있다. 목재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식당에서 창 밖의 푸르디푸른 호수를 감상하며, 장작 타는 소리를 음악 삼아 맛보는 스테이크와 와인이 맛이 없을 리 없다.
바릴로체의 모든 스테이크하우스는 장작을 지핀 그릴에서 두툼한 고기를 세게 구워, 불향이 진하게 입혀진 겉과 촉촉함을 잘 머금은 속살이 매력적이다. 기본적으로 치미추리(chimichurri)와 피코 데 가요(pico de gallo) 소스가 제공되며, 기본 부위인 립아이/안심/갈비 외에도 안창살인 엔뜨라냐(Entraña), 수제 소시지 초리소(Chorizo), 피순대 모르씨야(Morcilla) 등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더불어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대거 유입된 국가인 만큼, 파스타와 리조또 등 이탈리안 퀴진도 상당히 발전한 국가이다. 때문에 바릴로체에 방문할 땐 동행을 3인 이상 구해, 고기와 특수부위 그리고 파스타 등 메뉴를 다채롭게 주문해 맛보는 것을 추천한다.
바릴로체를 특히 사랑하는 이유는, 3천 원 남짓 하는 하우스 와인을 주문하면 잔이 넘치도록 찰랑찰랑 가득 채워줌에 있다. 꽉 찬 와인잔처럼 넘치는 인심을 간직한 바릴로체에 방문한 이라면 공허한 위장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워갈 수 있다.
2. 퐁듀(Fondue de Queso)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스위스 이민자가 많은 바릴로체에는 스위스 전통 가옥인 샬레(Chalet)를 활용한 식당, 스파 및 호텔이 다수 포진해 있다. 목조 오두막집인 샬레는 걸음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끼익-소리가 나는 정겨움과 따뜻한 분위기가 특징이며, 건물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집안 곳곳을 아기자기하게 장식한 주인의 푸근한 마음이 엿보인다.
바릴로체 센트로에 유명한 스위스 레스토랑이 다수 있다지만, 손님은 나뿐이고 평점도 많이 높지 않은 Chalet Suisse에 방문한 이유는 호수를 마주한 삼 층짜리 샬렛에 왜인지 마음이 이끌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주인 노부부는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문을 두드린 동양인 여성을 격하게 환영해 주시며, 가게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해 주시고 와인을 잔 끝까지 따라 주었다.
사실 빵과 감자, 소시지를 찍어 먹는 치즈 퐁듀가 특별히 맛있는 음식은 아니나, 원래 2인 이상부터 주문이 가능함에도 흔쾌히 1인분을 제공해 주는 이곳의 인심과 한국 시골 산장을 연상시키는 따스한 분위기 덕에 장기 여행자의 지친 심신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알프스가 아닌 남미의 푸른 호수를 바라보며, 주인 노부부의 강한 아르헨티나식 악센트로 바릴로체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Chalet Suisse에서의 퐁듀 한 끼는 그 훈기가 아직도 기억될 만큼 아름다운 추억이다.
3. 초콜릿과 토르타(Chocolate y Torta)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디저트는 우유를 졸여 만든 잼 둘세 데 레체(Dulce de Leche)이다. 하지만 바릴로체에는 둘세 데 레체가 아닌 초콜릿을 판매하는 가게가 굉장히 많으며, 세계 초콜릿 대회에서 우승한 샵 역시 여럿 존재한다. 그 이유는 역시 스위스 이민자들이 초콜릿 가공 기술을 도입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라파누이(Rapa Nui), 마무쉬카(Mamuschka) 및 프랜텀(Frantom)이 바릴로체에서 가장 유명한 초콜릿 샵으로 꼽히며, 그 외에도 각 집의 특색을 담은 초콜릿 세트를 판매하는 샵들과 초콜릿 전문 카페가 시내에 즐비하다. 특히 연말연시 시즌에 방문하면 선물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아름다운 패키지를 판매하니,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는 이라면 바릴로체에서 기념품과 선물을 가득 사 가도 좋다.
바릴로체에서 맛본 초콜릿 메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Frantom 카페의 초콜릿 케이크. 테린느의 세 배 정도의 진한 맛을 자랑하는 무스 위, 건두부 또는 장작은 연상시키는 꼬득꼬득한 밀크 초콜릿이 너무나 향긋하고 밀도 높은 풍미를 자랑한다. 추운 바릴로체를 거닐다 당이 떨어질 무렵, 따뜻한 아메리카노 또는 카푸치노와 이 케이크를 한 입 머금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더불어, 중남미에서 맛본 디저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Torta Bariloche를 소개한다. 바릴로체식 케이크는 초콜릿과 크림, 코코넛, 견과류를 듬뿍 넣어 아주 푹신하고 달게 만든다고 한다. 유명 초콜릿 샵인 Frantom에서 맛본 토르타 바릴로체는 견과류 대신 졸인 밤과 잘게 부순 머랭을 꽉꽉 채워 넣고, 눈 같은 코코넛 플레이크를 부슬부슬 올려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맛과 모양새였다.
중남미의 디저트는 대체로 입이 아리게 달며 모양새 역시 투박하다. 더불어 한국 또는 유럽과 비교해 양이 매우 푸짐한 편이다. 바릴로체에서 맛본 초콜릿과 토르타 역시 혼자 먹기에는 매우 달았다. 당신이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게 된다면 바릴로체의 조용한 초콜릿 샵의 창가에서 아끼는 이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디저트의 달콤함을 천천히 음미하길 바란다.
바릴로체의 어떤 카페와 음식점을 방문해도, 혼자 방문한 여행객을 환대해 주며 가게의 대표 메뉴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더라. 소도시에서 보다 농밀하게 느껴지는 푸근함과 열린 마음이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엽서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미식과 자연을 사랑하는 이라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바릴로체에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얀 자갈이 투명하게, 그리고 선명히 들여다 보이는 푸르디푸른 호수를 눈과 가슴에 담아 오길 바란다.
▽ 바릴로체 여행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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