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4월 (1)

세상의 넓이

by 하도

하나.


내 삶 속에는 여러 명의 누리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하나의 누리아가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계속 내 앞에 나타난 건 아닌가, 하는 상상이 들 때가 있다. 그 상상 속에서 누리아는 이름이 곧 본질이고, 눈앞에 보이는 형상은 환영이다. 기표와 기의의 순서가 뒤집히는 순간. 물론 나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모른다. 모든 누리아들은 의미가 쉽게 휘발하듯, 이미 사라져 버렸고, 그 이름만이 내 기억 속에 남아 흐릿한 이미지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은다. 이것은 내가 만난 첫 번째 누리아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그 아이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누리아였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그곳 랭귀지 스쿨에서 처음 만났다. 누리아는 그 아이의 본명이 아니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이는 대만에서 왔고, 어려운 중국어 이름 대신 스스로 고른 스페인어 이름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진짜 누리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누리아 대신 다른 이름으로 그 아이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나 역시 그 무렵에는 내 본명 대신, 어느 클래식 기타리스트한테서 따온 스페인어 이름을 쓰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두 아이가 서툰 스페인어로, 스페인어 이름을 서로 부르면서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쩌면 조금 우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랭귀지 스쿨 맨 꼭대기 층에는 작은 카페테리아가 딸린 테라스가 하나 있었다. 그 테라스의 공기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뒤섞여 항상 시끄러웠고, 수업이 끝나고 숨 쉬러 나갈 때마다 그곳 공기는 나를 무겁게 짓누르며 어지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외국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는 스페인어를 쓰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자기들끼리 영어로 떠들기에 바빴다. 나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한 마디도 모른 채 그곳 생활을 시작했다. 누리아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아이도 나처럼 두 언어 모두 전혀 하지 못했다. 우리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스페인어도 차차 흐르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건가요? 좀처럼 늘지가 않아서 답답해요.” 길에서 마주친 스페인어 선생님에게 불평을 하자,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스페인어 많이 늘었네요. 지금 내 말도 다 알아듣고. 스페인어로 불평도 하고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 스페인어는 느리지만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누리아의 스페인어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우연히, 레벨이 올라가면서 새로운 반을 나누었는데, 누리아와 나 단 둘이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선생님 한 명, 학생은 우리 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그것은 개인 교습 시간 같은 분위기였다.


하루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업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스토리 지어내기 활동을 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한때 시나리오 쓰기에 몰두했던 나는 그 수업에서 바위 사이를 뛰노는 다람쥐처럼 꽤 재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외국어 수업 시간에 쓰일 짤막한 이야기 정도는 즉흥적으로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다. 누리아는 내가 지어낸 짧고, 웃을 때마다 침 대신 금가루를 튀기는 빨간 풍선 같은,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너무나 재밌어했다. 우리는 즐겁게 시간을 보냈고, 나는 스스로 뿌듯했다. 오랜만에 내 장기를 하나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아직도 그 수업의 몇몇 재미있었던 순간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처럼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나중에 누리아는 나를 두고 'Un chico con mucha imaginación.'이라고 묘사해 주었다. 한국말로 하면 상상력 풍부한 소년 정도 되려나.


낯선 외국 환경 속에서 낯선 말을 배우느라 조금 주눅 들어있었지만, 나는 말이 좋았다. 조금 느려도 내 말이 자연스럽게 흘렀을 때, 누리아와 선생님은 깔깔대며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말을 가지고 사람들 또는 세상과 소통하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지어 세상 자체를 만들어내는 듯한 기분을 즐겼다. 말로는 그 무엇이든 다 만들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다 함께 한참을 웃다가, 시선을 조금 아래로 떨구었을 때, 누리아의 책상 앞에 앙증맞게 모인 운동화 신은 양발이 눈에 들어왔다. 참 작은 발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여자친구들을 생각나게 하는 발이었다. 발 페티시가 있는 건 아닌데, 나는 발이 작은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원래 모든 여자들은 한결같이 다 발이 작은가? 모든 여자들을 다 만나본 건 아니라서 그건 잘 모르겠다.


까딱까딱. 그 작은 발들이 움직였다. 잠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밤 오랜만에 누군가와 달콤한 키스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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