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넓이
셋.
몇 달이 또 흘렀다. 우리의 반은 다시 나뉘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마다 테라스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스페인어는 처음에 비하면 꽤 늘어있었지만, 중급반에서 고급반으로 넘어가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테스트를 칠 때마다 우리는 둘 다 번번이 떨어지기만 했다.
그 무렵 나는 디자인 학교를 고르는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 올 때 학교를 먼저 고르고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얻을 수 있는 현지 정보가 부족했고, 그래서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나서 지원하고 싶었다. 크게는 공립학교냐 사립학교냐라는 선택 문제가 있었고, 입학 조건이나 커리큘럼을 살펴야 했고, 그다음에는 어디에 있는 학교를 가느냐 하는 것들을 결정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괜찮아 보이는 학교를 하나 찾았다. 그 학교는 마드리드에 있었다. 다시 한참 고민 끝에 그 학교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누리아를 만나 내 결정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가고 싶은 학교를 하나 찾았어.”
“와 축하해. 무슨 학교야?”
“그게… 마드리드로 가야 해.”
“굳이 마드리드까지? 학교는 여기도 많아.”
“마드리드에 사립학교를 하나 찾았어. 그 학교가 좋을 것 같아. 스페인어는 생각보다 어렵고 내 지금 실력으로는 당장 공립컬리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리고 여기 있는 공립학교들은 커리큘럼 기간이 짧아. 그 학교는 학과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수도 있고, 졸업증도 공립처럼 똑같이 인증받고 그래. 그리고 사립학교면서도 3년 코스라서 그걸 핑계 삼아 나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시간적 유예를 줄 수 있어.”
이런 얘기들을 여전히 서툴고 낯선 스페인어로 띄엄띄엄 그러나 진지하게 설명했다. 누리아는 조용했다.
잠시 후 꼭 가야만 하는 거냐고 그 아이가 짧게 되물었다. 이번에는 나도 조용해졌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내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었다. 삶은 계속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내가 떠나는 날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단 도시를 옮기기로 결심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일단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학교 등록부터 마치고, 가을에 전공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스페인어도 계속 배우고, 아쉬웠던 영어도 새로 배울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웠다.
마드리드로 떠나기 하루 전 누리아와 나는 관광투어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를 한 바퀴 돌았다. 떠나기 전에 그동안 정들었던 도시를 한 바퀴 쭉 둘러보는 것은 좋은 생각 같았다. 누리아의 아이디어였다. 버스는 굽이진 도로를 타고 우리를 도시 구석구석 안내했다. 이미 친숙한 풍경도 있었고, 처음 보는 풍경도 있었다. 누리아는 아는 것이 많았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저편에 유명하거나 역사적인 장소가 보이면, 저기는 어떻다더라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말하는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그것들을 충분히 설명할 만큼 스페인어 실력이 늘어있었다. 그렇게 뚜껑 열린 버스 이층 맨 뒷자리에 앉아 바람 소리에 뒤섞인 누리아의 목소리를 내내 들었다. 그 밖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별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버스는 계속 달렸고, 누리아는 계속 뭔가를 말했다. 저 멀리 가우디 대성당이 보였다. 어딘가 담벼락에 '카탈루냐, 이즈 낫 스페인.'이라고 영어로 낙서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머물던 곳 근처에 가끔 들리던 한 카페가 있었다. 버스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창가의 어느 테이블에, 누리아는 창을 등지고, 나는 그 아이를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 두 개만 달랑 놓여있었다.
"아까 설명을 참 잘하더라. 나중에 여행사를 차려도 되겠네. 언제 그런 걸 다 배웠어?"라고 내가 말하자, 누리아는 자기는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지나간 시간 속을 여행하는 일은 늘 즐겁다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 대견하지 않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거의 아무 말도 못 했었잖아."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땐 그랬었지.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누리아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머물고 싶었다. 시간은 정말 빨랐다.
문득 반쯤 남은 커피들이 보였다. 이 커피를 다 마시면 이제 헤어져야 한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아쉬움이 밑에서부터 커피 크림처럼 조용히 부풀어 올라왔다.
“마드리드에 가서 행운을 빌어.”누리아가 마지막 인사말처럼 말했다.
시간이 좀 더 느리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그 순간을 늦출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누리아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금 망설이고 있자, 그 아이도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 내가 넌지시 물었다. 응, 고마워라고 말하는 대신에.
누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누리아의 표정을 잘 살필 수가 없었다. 얼굴에 진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역광에 묻혀, 머뭇거리는 듯 희미한 미소가 보였던 것 같았다. 햇살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고, 나는 눈을 찡그렸다. 바르셀로나의 햇살은 봄이었는데도 너무나 강했다. 그 아이 어깨너머, 카페 유리창 너머로, 저 멀리 푸른 공원이 보였다. 강한 햇살을 피해 반쯤 감은 내 눈에,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오가는 모습이, 점처럼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