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와 그 부끄러움, 그리고 파란약과 호러

날것의 자아

by 하도

하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유명한 구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테크니컬 한 답변을 써보려 한다.


내가 금연이 가장 쉬운 대상이었다고 말하면 어떻게 금연이 그럴 수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정말이지 비록 십 년씩이나 걸렸어도 내겐 금연이 가장 쉬웠다. 누구에게는 공부가 가장 쉬웠듯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흡연 욕구는 그 관념적이고 감정적인 구조의 실체가 비교적 분명해서, 그것을 겨냥해서 제거하기가 제법 쉬운 대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구조를 똑바로 바라보고, 흡연 욕구를 쉽게 떨쳐버리는 일이 가능했다. 약간의 트릭과 함께.


하지만 사회와 타자와 자아 사이의 관계 구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대부분의 욕망이나 부조리한 충동들의 실체는 또렷하게 바라보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 ‘아, 내게 흡연 욕구라는 놈이 있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더 어렵고, 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더 많은 관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흡연은 그 해악 관계가 분명하지만 어떤 충동들은 마치 처음부터 우리 안에 담겨있었던 듯 자연스럽기까지 해서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때도 많다. 가령 사회적 신분에 대한 집착 같은 것.


권위적이고 오만한 말투로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낮추는 고위 공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자아는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리면 금방 분열되곤 한다. 그 모습에는 이미 자기가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이탈된 듯한 이미지가 담겨있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 사람은 대체 왜 어떻게 해서, 그런 자아상을 구축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가령 심리학이라면 그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는 기법을 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위 공직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에고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자기를 응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외부 대상과 자극에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활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미디어일 수 있고, 그냥 이 세상 자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소음은 당신의 시선을 언제나 간섭한다. 만일 부조리를 자신의 삶의 본연에서 이탈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런 자기 응시의 시선은 자신의 본모습에서 유리된 그 차이들을 드러내고 그러한 부조리한 감정을 재생할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감정이다. 어떻게 자기 지위를 빼고 자기를 논한단 말인가.


부끄러움 없이 자기 안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이 많이 없을 것이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그러한 부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충분히 지닌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의 날 것의 자아가 어떤 모습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대게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그냥 덮어버려야 할 대상이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부조리에 대한 수치심에 지배당한다.


그 ‘덮는’ 행위는 꽤나 중요할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사적 영역을 지키고 보호하는 행위는 본능적이다. 자신의 밑바닥을 부지불식간에 들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타인의 강제에 의해서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점을 더없이 잘 이해할 것이다. 그것을 덮는 것은 자존심을 지켜나가기에 중요하다. 여기서 처세적 교훈을 하나 이끌어낼 수 있다.


‘타인의 자존심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한 친구의 자존심을 자극한 적이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네가 나를 시기하는 것 같네’ 어쩌네 유치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하게도 바닥에 드러나기 직전에 처한 한 사람이 얼마나 완강히 그것을 덮으려고 저항하는지 목격했다. "시기가 아니라고? 그럼 아까 네가 했던 그 말들은 다 뭔데?"라는 일종의 증거를 제시하자, 그 친구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야’라는 말을 그렇게 흥분된 어조로 말하는 것은 처음 들어봤다. 자신의 수치심을 숨기려는 그 몸짓은 마치 하나의 인격이 거의 자기 분열 직전까지 가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는 감정에 격앙되고, 방금 전까지의 언행을 순식간에 뒤집고, 자신의 모순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오랜 시간 잔상처럼 남았고, 또 생각했다.


‘타인의 판타지를 침범하지 말라’




둘.


타인의 환상을 건드리는 것은 죄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자신을 믿을 권리가 있고, 그것은 존중해 주는 것이 윤리이자 도덕일 것이다. 자신의 밑바닥이 드러나면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상대를 죽이고 싶어지는 것은 아마도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아무리 자기 성찰적인 사람이라도 자신에 대해 허용할 수 있는 이미지의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 선을 넘어가 날 것의 자기 모습이 드러나면 괴로워한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저 빨간약과 파란약 장면은 너무나 쉽고 직관적인 비유를 제공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꽤 자주 인용되는 것 같다. 너무 손쉬운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내가 그 비유를 사용해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빨간약을 고르는데 망설임 없는 용기를 지닌 사람도, 그 드러남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면 분명히 주저하게 될 거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판타지를 지킬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란약을 고르고 나서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 가짜면 어때, 결과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나은데. 진짜와 차이도 없는데.


하지만 누구나 이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가령, 파티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정신없이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내고 지쳐 돌아왔을 때, 또는 정신없이 빠른 업무 리듬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 자신의 유능한 모습에 스스로 감탄하다가 퇴근하고 적막 어린 순간을 마주했을 때, 또는 감동적인 연속극을 시간을 잊고 몰입해서 보다가 스크린을 끄고 잠잘 준비를 할 때, 그러다 불현듯 속에서부터 내가 하루 종일 몰입했던 감정들이 진짜 내 것이 아니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때, 그 속에는 내가 의도적으로 어떤 진실된 감정을 의식 뒤편으로 숨기려 했음을 깨달을 때, 진짜 자신과 자기가 추구하는 모습과의 차이를 어렴풋이 느꼈을 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워버리거나,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틀거나, 술을 마시거나, 멜라토닌 한 정을 물과 함께 삼키고 잠을 청하거나, 아니면 나에게 좋은 말을 해줄 법한 누군가를 찾아 밤늦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항상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다. 어떤 현실이라는 구조가 주어지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딱딱 맞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궁금함에 그 무대 뒤 커튼을 살짝 젖히고, 그 뒤에 돌아가는 둔탁하고 암울하게 생긴 기계 장치들이 어떤 모습인지 힐끔거리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호기심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다. 물론 힐끔거리다 커튼을 다시 닫고 무대 앞 원래 좌석으로 돌아올지, 그 어둠 속으로 한 발 더 내디딛을지는 아무도 강요할 수 없는 개인의 선택권이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공연만을 즐기기에도 인생은 충분히 짧다. 하지만.


나 역시 내 바닥을 타인 앞에 들켜본 경험이 있고, 죽을 것처럼 수치스러웠던 그 감정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했던 경험은 처음 스스로가 그 바닥과 마주했을 때였다. 호기심을 못 이겨 한걸음 더 들어갔을 때, 대체 자아는 몇 개의 껍질로 이루어진 것인지, 처음에는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밑바닥이라고 여겼는데, 그 너머에 또 다른 바닥이 있더라. 절대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덮어버렸으면 차라리 나았을 그런 종류의 진실 같았다. 차라리 파란약을 먹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 경험을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한 때 나는 내가 쌓아 올린 나만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고, 그 세계를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나의 작지만 소중한 성취들, 개성 넘치는 친구들과 인맥,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느꼈던 가치관과 아이디어들, 뭔가 남다른 것 같은 내 취향과 개성, 존경스러운 부모님과 수재였던 내 동생, 좋았던 추억들, 어릴 때부터 모았던 클래식 음반들, 쌓아 올렸던 글쓰기 노트들, 이러한 것들이 한데 조합되어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나는 나만의 어떤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 후 말로 차마 설명하기 힘든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그것들이 그저 나를 둘러싼 껍질에 불과했고, 자신의 초라한 본모습을 숨기려는 어떤 몸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믿음과 그 바닥 사이의 빈 공간에서는 어떤 서글픈 감정이 올라왔다.


날것의 자아를 감당하기란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벅찬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환상과 의미를 결합해 구조물을 쌓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어떤 믿음을 쌓아 올리고, 그에 의탁해서 삶을 살아간다. 그 믿음의 구조는 확연히 의미적이고, 언어적이며, 사회적이고, 때로는 본능적이다. 우리는 날마다 다큐멘터리를 찍지만, 그 날것의 영상들은 가위질당하고 즉 검열당하고, 또는 순서를 재구성해서 더 보기 좋은 의미로 탈바꿈되고, 그래도 손에 들고 있던 시나리오에 맞지 않으면 망각이라는 쓰레기 통 속으로 던져진다. 그렇게 편집된 영상은 우리가 자아를 재구성하는 원료이고, 그런 식으로 재구성된 자아는 우리가 거친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의존하는 무엇이다.




셋.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를 보다 보면, 현실과 환상 사이의 틈새가 무너질 때 훅 올라오는 그 어떤 서늘한 감정이 있다.


‘네가 믿는 현실은 사실 현실이 아니다’


이런 구조를 가진 호러 영화들을 한 무더기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안정감 있는 현실 감각과 함께 ‘말이 되는 이야기’를 즐기고 싶을 때 호러 장르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눈을 감거나 귀를 막거나 그도 아니면 스크린을 꺼버린다. 그렇게 해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신이 방금 꺼버린 그 호러영화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신이 도망쳐 돌아간 그 현실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종류의 환상은 유지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령, 마치 호러장르의 어느 흔한 플롯처럼, 자신이 괴물 혹은 기형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단계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미 죽은 귀신임을 뒤늦게 발견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즉 자신이 이 세상에 실은 아무 의미가 없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괴물이라면 자살이라는 선택지가 있지만, 자신이 이미 죽어있었음을 발견했을 때는, 더 죽을 수도 없다.


그래서 당신이 파란약을 골라도, 그것은 당신 고유의 권리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윤리적인 결함이 없다. 자신에 대한 선택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빨간약을 고르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덮는 행위는 꽤나 중요하지만, 자신이 아닌 것에서 자신을 찾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아닌 것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원래 자신이 아니었던 것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그 믿음의 구조를 유지하는데 우리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는 점이다. 자아에 대한 어떤 이미지, 또는 꿈, 또는 어떤 의미에 붙잡혀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일 수도 있고, 부모에게서 내려온 것일 수도 있고, 사회나 국가로부터 주입된 것일 수도 있다. 시간과 함께 허물어져가는 그러한 환상에 집착할 때 우리는 쉽게 추해진다. 과도한 성형으로 얼굴이 무너져 내려가는 유명인들의 모습은 꽤나 상징적이다. 미학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가 스스로의 모습이 그러한 추구의 끝에서 스스로의 욕망의 기준에 못 미칠 때, 그 실망감이 극단으로 치닫으면, 그 마지막은 자기 파괴의 모습일 수가 있다.


자신이 믿었던 현실이, 현실이 아님을 마주했을 때 자살을 선택하는 플롯은 영화 장르에서 너무 흔해 빠져서 거의 클리세에 가깝다. 그 구조에는 어떤 설득력과 어떤 심리적 진실이 담겨있지만, 어떤 당위성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환상이 파괴된 이후에도 자신의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그 무엇을 바라보며, 그게 없다고 자신의 삶마저 포기하는 이미지는, 마치 개 한 마리가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지쳐 쓰러지는 모습과 비슷하다. 내 삶의 잠재력은 여기 이 자리에 있는데,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나가려는 것과 같다. 그런 이야기들은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위해 대부분 자기 파괴적으로 끝난다. 진실을 깨끗이 받아들이고, 시간을 들여 삶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럼 장르가 바뀌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전환의 과정에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이 글은 그 과정의 가장 첫 번째 단계에 관한 코멘트이다. 그 첫 단계는 아마도 날 것의 자아를 마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극복하려면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자신이 완전무결한 상태여야만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덮어버리는 행위에 대한 결과론적인 감정이다. 부끄럽기 때문에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버리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다른 잠재력들이 펼쳐진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숨겨진 부끄러움을 내려놓을 때, 자신에 대한 수사적 어구들에 아무런 의존함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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