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와 그 부끄러움, 그리고 파란약과 호러

에필로그

by 하도

이 글도 에필로그를 써보려고,

빈스크린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덧붙이고 싶은 말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 글은 그대로 남겨둔다.


Así como es.

(As it is.)





여기까지가 멋들어져 보이려고 힘주어 썼던 원래 에필로그다.

그러다 문득 에필로그를 빙자해서 다른 글을 짧게 써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처럼 보였다.


호러장르는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대상과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은유다.


나는 호러를 꽤나 즐기는 편이고, 또 에드거 앨런 포의 팬이다.

그의 감수성은 단단하게 여며진 이성의 틈새로 스산하게 스며드는 바깥세상의 찬공기에 관한 것이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다시 한국어로 독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맨 처음 구입한 책이

시공사에서 새 번역으로 나온 에드거 앨런 포 전집이다.


그의 작품들 중, 그 유명한 '모르그가의 살인'은 호러장르는 아니지만,

그 구성에서 꽤나 인상적인 구조적 대비를 보여준다.

그 작품의 도입부에서 포는 이성적 논리와 추론적 분석에 대한 지론을 꽤나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나는 어릴 때 이 대목만 말 그대로 수백 번쯤 읽었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이 밝혀졌을 때,

다들 알겠지만 그 범인은 인간이 아니다.


면도칼을 들고 설치는 덩치 큰 유인원.


이 작품의 구성은 그 자체로 이성적 사유의 예측성을 넘어,

우발적으로 현실계에 칩입하는 어떤 비이성적 존재에 대한 은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포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방법론을 따라, 그 '비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흉측한 유인원이 어느 날 자기 심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다면 꽤나 공포스러울 것이다.

그 대상이 꼭 초현실적인 괴물일 필요는 없다.

우리의 예측이나 믿음을 배반하는 어떤 못생긴 대상이면 충분하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낼 때 우리의 시야가 확장된다는......

그런 말을 해보고 싶었다.


결국 에세이에서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말이지만,

같은 얘기라도 다르게 풀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르그가의 살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에세이를 따로 한 편 써보면 좋을 것 같다.

결국 또 똑같은 얘기를 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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