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오래전 내 블로그에 묻혀 있던 글들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인터넷 공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글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누군가에게 그 블로그를 보여 줄 일이 있었다.
그때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읽는 그 감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한 프로젝트 쫑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느 호텔 건물 1층에 위치한 널찍한 바였다. 오래된 빈티지 오락실 기계들이 놓여있는 곳이었다. 음악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오락기의 전자음들이 한데 뒤섞여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회사에서 나누어준 쿠폰으로 진토닉을 한 잔 시키고 사람들 사이에 합류했다.
쫑파티였던 만큼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오고 갔지만, 어쩌다 보니 여행에 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여행 경험담을 나누기 시작했고 내가 스페인에서 몇 년 간 살았다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테이블 건너 내 맞은편에는 헝가리에서 온 직장 동료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마드리드에 가 볼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자기도 스페인은 아직 안 가봤다면서.
스페인에서 머물렀던 것은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아니, 흐릿한 이미지들은 남아 있었지만, 말로 꺼내려니 장소나 그 이름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 읽었던 이 글이 마침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 글을 발판 삼아 그때의 기억을 조금 되살릴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마드리드 도심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라띠나라는 구시가지 지역인데, 오래된 3층짜리 극장 건물이 있고, 그 옆에 작은 아파트 하나가 납작하게 붙어있어. 그 맞은편에는 공공시장이 있고, 그 뒤로 돌아서 솔 광장 쪽으로 올라가면 골목길에 카페 갈도라는 바가 있는데, 가끔 음악도 연주하고 그러는 곳이야. 마드리드에 방문하면 한 번 들러봐."
그냥 대화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의미 없이 장황한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구체적인 묘사를 이어가자 오른편에 앉아있던 캐나디안 동료 하나가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니, 내 얘기를 듣긴 한 거야? 내가 거기서 살았다니까."
그 헝가리안 동료가 가볍게 실랑이는 우리 둘을 번갈아 재빨리 바라보더니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아이폰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찾는다.
"여기 맞아?"
그녀가 불쑥 내민 화면에는 엉뚱한 바 이름이 찍혀있었다. "내가 찾아줄게." 그녀의 아이폰을 빼앗아 들고, 작은 스크린 위에 '카페 갈도'를 타이핑한다.
'어 근데 없다. 스펠링이 틀렸나?' 다시 쳐봤다. 그래도 검색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지금은 없어졌을 수도 있겠구나. 하긴 시간이 꽤 흘렀지......'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가 꾸며낸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그 캐나디안 동료에게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내가 진작 궁금했더라면, 이처럼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쉽사리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그 바가 사라졌다면 슬픈 감정이라도 들까 봐? 아니면 정말로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곳이라서?
그도 아니면, 그곳이 거기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듯이 그 흔적이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
그 기억들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상관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