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겨울 재킷

삶의 기반

by 하도

날마다 반복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일상이라고 부르자.


일상이라는 단어는 내게 복잡한 감정을 준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것이 일상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외국땅에서 날마다 밥벌이를 하게 되면서, 그 단어에 대한 태도도 조금은 달라졌다. 일상을 벗어나는 삶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글쎄, 내가 재벌이나 건물주 또는 유명 스타의 삶을 살아본 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제한되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외국에 나가 살면 그 흔한 일상마저도 짜릿하고 다채롭게 채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상은 일상일 뿐이다.


물론 사람마다 제각각 성격과 기질이 다르듯, 일상을 대하는 감정과 태도도 사람바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이건, 일상은 우리의 삶의 기반을 구조화하고, 우리는 그 구조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는 새 재킷을 사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남반구 도시인 여기는 지금이 겨울이고, 요즘 들어 밤낮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그래봤자 한 두어 달만 지나면 또 봄이 오고 다시 따뜻해지겠지만, 이 참에 새 재킷을 장만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오래전 바르셀로나 시내의 자라 매장에서 산 회색 겨울 재킷을 아직도 입고 다닌다. 그동안 더 마음에 드는 재킷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너무 낡아서 정말로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그렇게 그 낡은 겨울 재킷을 걸치고, 마음에 쏙 드는 또 다른 재킷이 어디 없나 시가지 쇼핑가를 한참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매장에 들러도 마음에 드는 재킷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라운드 숄더 재킷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디자인을 찾고 싶은데, 그 옛날 디자인이 아직도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혹시 비슷한 종류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자라 매장을 방문했다. 있을 리가 없다. 해가 지났다고 예전 모델들을 다 없애 버리고 트렌드에 따라 디자인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면 조금 아쉽다. 마치 유행을 따르도록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결국 마음에 드는 재킷을 오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올해도 똑같은 재킷으로 겨울을 보내고, 새 재킷은 내년에 장만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내년이라고 마음에 드는 재킷을 발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말 오래 입은 재킷이다. 가볍고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내게 잘 어울린다. 예전에 멕시코시티에서 일할 때도 이 단벌 재킷 하나에 의지해서 추운 촬영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문득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곳에 있을 때,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름들을 지금은 잊어버렸다. 그 남자는, 지금까지 이름이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루이스. 그 회사에 있던 중간 관리자들 중 한 명이었다.


지독하게 똑똑하지만, 매우 차가운 성격이었다. 사람들하고 눈을 마주치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에게 대화란 오로지 그가 지닌 방대한 지식을 내보이기 위한 기회일 뿐인 것처럼 보였다. 회사 사람들은 그를 무척 어려워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공손한 태도로 질문을 하곤 했다. 그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았고, 나 역시 그에게서 배우는 입장이었다.


어느 날, 밤샘 근무 이후 함께 장비를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문득 내가 걸치고 있던 회색 재킷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나도 똑같은 재킷이 하나 있었어."


호기심이 일어나 말을 서로 맞추어보니, 그도 나와 똑같은 시기에 바르셀로나에 머물렀었고, 똑같은 장소의 자라 매장에 들렀었고, 똑같은 재킷을 구입했던 것이었다. 어떤 우연의 일치 같은 것.


"가볍고,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내게 잘 어울렸지."


그가 무심히 툭 던지듯 내뱉는다. 잠시나마 이 차가운 남자와 깊은 감정 교류가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올 한 해만 더 입어보자.’ 시내의 자라 매장의 거울에 비친, 낡은 재킷을 걸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결심을 했다. 하지만 모처럼 시내에 나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가기가 조금 아쉬웠다.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앱을 열어 저장해 두었던 구매 리스트를 꺼낸다. 혹시 재킷 대신 쇼핑할 거리는 없는지를 살핀다. 당장 급히 필요한 것은 딱히 없었지만, 오래 간직했던 구매 희망 목록이 눈에 들어온다.


랩탑, 태블릿, 모니터, 휴대용 빔 프로젝터.


모두 내 목록에서 3년 가까이 머물러 있던 물건들이지만, 마치 새 재킷을 계속 미루었던 것처럼 언제나 구매를 미루어왔다. 그것들 대신 다른 필요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셔츠랑 청바지가 낡았는데 이참에 사갈까? 역시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대신 근처에 있던 마이크로소프트 매장에 들러서 새로 나온 랩탑을 살펴본다.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지만 너무 비싸다. 어학 공부를 할 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많이 활용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데스크톱 옆에 다른 기기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한 모니터에 창을 여러 개 띄우고 공부나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 불편하니까.


또 금세 생각을 고쳐 먹는다. 랩탑은 너무 비싸니 대신 모니터를 하나 더 사는 걸로 하자. 굳이 좋은 거 말고. 적당히 싼 모델을 한 삼백불 선에서 구입하자. 그렇게 돈을 절약하기로 했다. 곧 영주권 신청을 하는데 목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돈을 절약해야만 했다.


그렇게 직접 구입하는 물건 하나 없이 머릿속으로만 이런저런 쇼핑 계획을 세우면서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결국 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오랜 친구 하나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이었다. 예전 이십 대 초중반 무렵처럼 한 번에 열 시간씩 통화하고 그럴 기운은 없지만, 그날도 한 다섯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느니 제법 오래 한 편이다. 사는 모습이 날마다 똑같다고 서로 투덜댄다. 그 친구는 최근 돈에 대한 집착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심정의 변화를 털어놓는다. "그래, 네가 편하면 그걸로 좋은 거지." 내가 짧게 한마디 던졌다. 큰돈을 벌어야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친구다.


문득 나는 랩탑 하나를 사기 위해 저축하고 기다리면서, 그렇게 평생을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곧바로 입 밖에 내어 말하자, 그 친구는 "누군 아니겠냐."라며 자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응수한다. 한편으로는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내 친구들은 모두 집이 두 채, 차도 두 대, 심지어 애도 둘씩 가지고 있는데, 나만 아무것도 없다. 내가 꿈만 꾸며 현실을 놓치고 있을 때, 그 친구들은 하루하루 일상을 충실히 살아냈고, 그 친구들의 경제적인 안정은 아마도 그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나도 현실감각을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감각을 키우기 위해 책을 찾아 읽고, 소액이나마 투자를 시작했고, 십 년 단위로 자산 계획도 짜보았다. 하지만 그 보다 큰 성과는 최근 몇 년 사이 일상의 상당 부분을 루틴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날 그날 해야 할 것들을 기계적으로 꼬박꼬박 수행하는 연습이다. 남들은 이미 다들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만 살며 생활에는 조금 무심했던 내 예전 모습과 비교하면 대견한 발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머리 감고 로션을 바르고 면도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머리 정돈을 하고 출근을 한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오후 근무를 하고 가끔은 야근을 한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챙겨 먹고 그릇을 씻고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하고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다가 잠에 든다. 주말이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고 밀린 게으름을 약간 피우다 다음 주 먹거리를 사러 간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시간은 후딱 지나가버리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심지어 영어공부를 할 시간마저도 부족해지지만, 그런 활동들을 위해 이 과정들 중 단 하나라도 희생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예전에는 남는 시간에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했다면, 지금은 일상적인 일들을 먼저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 다른 활동들을 한다.


이처럼 날마다 반복되는 것들을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봉급생활자의 삶이건,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삶이건 저마다 차이는 비록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일상이라는 게 있을 것이고, 그것은 살아가면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은 단지 조금 지루할 뿐, 어떤 부정적인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일상을 누리고 싶어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이 과정이 내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내가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어떤 감각적인 기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 기반이 무너지면 나는 다시 관념 속으로 무너져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열차 위칸에 앉아 창 밖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기차 속 공기가 쌀쌀해 걸치고 있던 낡은 겨울 재킷을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화려한 시가지를 빠져나와 굽이 진 레일을 타고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겨울 저녁의 풍경은 조용하고 또 심심하다.


결국 오늘도 아무것도 구입하지 못하고 빈손이다.


문득 오늘 하루가 너무나도 봉급생활자의 퇴근 후 일상답지 않은가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런 것이 일상일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무리 삶을 유지하는 데 그게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내 일상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지도. 이런저런 깊은 의문점이 생기지만, 나는 내일도 모레도 이런 식으로 변함없이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년에는 반드시 새 재킷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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