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D 공기와 상아 피부, 그리고 간판 없는 5층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지금은 습관이 돼버린
한국의 지하철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굉장히 낯설었다.
"이번 역은 디지털미디어시티 디지털미디어시티역입니다."
역이름이 외래어라서 외국인인 나에게는 익숙해야 당연하지만
서울살이 3년을 겪고 난 지금은 거꾸로 낯설다.
낯섦과 익숙함을 시계추처럼 오간 3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한국의 무당
그러니까, 내가 아는 말로는 샤먼을 찾아가는 중이다.
'무당' 글자가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붙지를 않는다.
이 역은 공기부터 LED처럼 반짝거린다.
열차에서 내려 약속한 출구로 걸어 나갔다.
통로가 유난히 길었다.
끝없는 타일이 반사시키는 빛과
광고판 자체의 빛으로 광고 속 여자의 피부는 상아처럼 투명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그리스에서 과제로 제출했던 조각품이
광고판에 계속 겹쳐 보였다.
내가 만들었던 조각들을 일렬로 모아놓은 쇼윈도 같았다.
한참을 걸어 출구를 나와 두리번거리는데
"헤이 피트, 여기야 여기"
나를 부른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조소과 친구 M양이다.
M양의 조각칼은 칼집에서 나오는데 항상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칼은 완전히 새로울 때만 창작이라고 불렸다.
그렇지만 강박이 커질수록 조각칼은 칼집에서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오늘은 M양이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신당에 가는 길이다.
이 또한 새로운 강박의 다른 형태인 것 아니냐,
의구심은 있었지만 한국의 무당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M양과 우신당으로 천천히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유독 전면유리인 건물들이 많았다.
햇빛마저 매끄러운 유리에 미끄러져 흘렀다.
땅바닥은 한 톤 더 밝고 덥게 느껴졌다.
그리스에서 상아를 더 매끄럽게 만들겠다고 흘리던 땀이 떠올랐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건물들의 키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건널목에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앞에는 엄마 손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 책을 든 아이가 혼자 떠들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본 옛날이야기를 엄마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시큰둥했고 아이는 휙 뒤돌아 보고는 나에게
"피... 피.."이라며 말하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지
'그림으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야기'를 펼쳐 손가락으로 짚었다.
모두들 편하게 '피트'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져
이젠 한국에서 진짜 내 이름을 듣는 것도 낯설다.
지갑 안 학생증에 'PYGMALION, Exchange, Sculpture'라고 쓰여있던 게 간신히 기억났고
학생증 사진이 멋쩍게 웃었다.
M양도 툭치며 웃었다.
엿듣고 있던 신호등도 때마침 바뀌고 우리 갈길을 열어줬다.
우린 다시 우신당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마주한 건물은 5층 건물로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
나이 지긋이 먹은 어른 같은 풍모 같았다.
중간중간 변색되고 이끼 낀 타일은 마치 검버섯,
군데군데 흐른 물자국은 눈물 자국 같기도 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다양한 업종의 상가들이 있었다.
1층은 증명사진 전문 사진관, 행정사
2층은 코딩 학원과 면접 코칭 학원
세 번째 층은 스트레스 클리닉, 타로 마스터
또 그 위층은 보험 설계사, 세무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부터 한 층씩 거쳐서 올려다보니
각기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간판들,
세상의 다양한 문제들과 해결책들을 모아 붙인 콜라주 작품으로 보였다.
고개를 든 시야 끝에 외벽엔 간판 없는 5층이 보인다.
우신당은 모든 문제들을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다섯 번이나 돌아 올라갔다.
이런 오래된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왜 이런 꼭대기에 우신당은 자리 잡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층층이 올라가면 각 층별 흘러나오는 빛, 소리 그리고 냄새는 달랐지만
각기 다른 고민들의 흔적일 뿐이었다.
다 올라왔다. 복도 안쪽에서, 나무 간판 하나가 겨우 빛을 받았다.
M양과 나는 서로를 봤고, 다시 간판을 확인했다.
'오신당' 하고 약간 삐뚤어진 나무 간판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ㅜ' 글자가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려 '오신당'으로 보인 것이다.
우리는 큭큭대며 수초 간 웃었다.
웃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안쪽에서 누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