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낯섦 (하)

각주쌀통의 두 처방: 브리콜라주와 낯설게

by 잭옵

뻑뻑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에는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도서관 바닥처럼 깔렸고

그 위에는 오늘 아침에 태운 신선한 소나무 향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온갖 언어의 문자들이 고리에 고리를 만든 것 같은 종이발이 늘어져 있었다.

종이발 너머에는 방향제, 담배냄새, 향수가 복잡하게 섞여

방안의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힘들었다.


안에 들어서자 책이 들쑥날쑥하게 꽂혀 있는 책장들로 사방이 둘러져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테이블, 그 양쪽에 좌식 등받이 의자들은 이미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시점을 옮겼다.

부채는 책 위에 방울은 그 반대에 그리고 작은 항아리는 손님 의자 쪽에 놓여 있었다.

각자의 임무를 기다리는 신령한 동물들 같았다.


이 방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동 떨어진 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리석음을 찾아오셨습니까?"

그의 말투는 그의 흰색 티셔츠처럼 약간 천천히 늘어졌다.


M양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리석음을 찾습니다."

나도 따라 숙이며 그를 쳐다봤다.

덥수룩한 그의 정수리는 웬만한 건 뒤로 미루는 게으른 여유처럼 보였다.

약간 빛바랜 티셔츠도 교체가 미뤄진 것 같았다.

까끌까끌해 보이는 수염은 까칠함, 깐깐함, 까탈스러움을 까먹은 지가 까마득해 보였다.


서로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M양은 자신의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척 다시 남자를 천천히 쳐다보고

이 공간, 물건들과 남자의 어긋나 보이면서 이어지는 하나의 선,

친근함보다는 생소함을 던져주는 이 낡은 건물의 첫인상과 구조,

또 지하철역 광고판의 매끈한 얼굴들,

내 조각과 광고 상품 가운데 선 비너스,

그녀의 손을 쳐다봤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멈춰서 있다.


"피트 씨 피트 씨는 어떤 어리석음을 찾으십니까?"

그가 나를 이 공간으로 다시 잡아당겨 물었다.


"저.. 저는 여기가 익숙하지가 않네요.

한국의 신을 모시는 곳은 처음이에요.

그리스에서는 비너스 신을 모시는 제사장을 만난 적이 있지만.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저는 그냥 M양 따라온 겁니다. 특별히 찾는 것은 없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M양. 앞에 각주쌀을 한번 뽑아 주시죠."


M양이 항아리 안에 손을 넣어 자신의 각주쌀을 골랐다.

잠깐 앉은 중심이 무너져 나에게 살짝 부딪혔고

내가 M양의 어깨를 바로 잡아 줬다.

'탁' 정전기가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그녀는 고른 각주쌀을 책상에 놓았다.

각주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도 손을 흔들어 남은 정전기를 떨궈냈다,



남자는 테이블 한쪽에서 기다리던 방울을 집어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방울 사이사이에는 금속 책갈피가 끼어 있었다.

방울과 금속이 서로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었다.

이번엔 날카로운 소리를 반 가르면서 부채가 뛰어올랐다.

그 남자의 머리를 한번치고 "생각의 어리석음"

가슴을 치고 "감정의 어리석음"

다시 책으로 돌아가 책을 세 번 치면서 "글의 어리석음"을 말했다.


책상 위에서 날개를 펴듯 부채가 촤~악 펴졌다.


"어리석음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을 준다.

어리석음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어리석음만이...."


남자의 얼굴에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짓궂은 웃음이 묻어났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곳에 굵은 검지를 살포시 가져다 댔다.

부채를 꽉 잡은 손은 꼬옥 잡은 손으로 바뀌어 있었다.


"불쌍한 우리 젊은 영혼들"

"창작과 예술이 그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이러다간 두배로 빨리 늙게 된다고

이 아저씨 피부처럼 푸석푸석 해지고"

자기 얼굴을 만지면서 말했다.

톤과 억양이 올라갔지만 분명 남자 목소리였다.


굉장히 낯선 장면에 평소 조각칼을 잡던 내 오른손이 떨렸다.


"어디 각주쌀을 보자"

그 남자가 곱게 각주쌀을 열어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남의 것 70%. 나의 실수 30%. 어... 이 쪼그만 글자는 뭐지?"

우신은 종이를 좀 더 가까이 봤다.


"낯설게?"

종이를 보던 눈은 바로 나를 향했고.

따끔, 남은 정전기가 손끝에서 한 번 더 튀었다.

조각상의 비율을 측정할 때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게 되었다.

감은 한쪽 눈엔 매끄럽던 조각상에 금이 가고

거칠고 울퉁불퉁한 조각상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다시 M양을 쳐다보면서

"70%는 무조건 남의 것을 베껴~ 복붙 알지? 컨트롤 C 컨트롤 V"

"그럼 100% 인가?"

말하고도 앞뒤가 안 맞다는 듯이,

그 남자는 헛소리를 치우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없는 뒷머리를 털었다.

"완전은 말고 70%만 일단 베껴. 그리고 30%는 너의 실수로 채워 넣고"


말을 듣던 M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갸우뚱했다.

"베끼고 실수를 하라고 하시면..."


"일단 70% 베껴놓고 잘할라고 하지 말고 망쳐본다 생각하고 맘껏 해보라는 거야"

"조각칼이 맘대로 놀 수 있게 하라고"

부채가 조각칼이 된 듯 허공을 마음껏 움직였다.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M양은 박수를 치며

"아~~ 어리석으십니다. 역시 어리석으세요."


"이제야 말 좀 통하네. 호호호"

"피트라고 했지? 피그 씨는 말이야. 비밀이 뭐 그렇게 많아?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다 알아서 오늘 하루 종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줬잖니?

뭔가 바뀐 게 있을 거야.

모르겠으면 나중에 또 오고

그땐 복채 들고 와야 해~"


일단 '맞습니다' 말하는 한국의 예의스러운 대화법으로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다.

첫 수업에서 모르면서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친구들과

고개를 젓고 있는 내가 떠올랐다.


나와 M양은 자리를 털고 인사하고 우신당을 나왔다.


그 후 한 달이 지났다.


M양은 작업실에서 새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말도 없이 칼을 꺼냈고, 망설임 대신 먼저 흠집을 냈다.

M양이 우신당에 감사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조각하는 M양이에요. 말씀대로 하니까 손이 그냥 나가요.”

“피트 전화받아봐.”


나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복채를 또 들고 갈 이유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파가 안 좋은지 지지직거리는 가운데, 낮은 남자 목소리가 물었다.
“통화가 매끄럽지가 않네요.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요. 잘 지내시는 거죠?”


“네. 잘 지냅니다. 조각도 잘 되고 있고요. 다음에 다시 인사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거칠게 표현된 내 조각상을 바라봤다.


나는 무심코 사포를 찾다가 손을 멈췄다.

손끝으로 거친 면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매끈한 광고판과 내 조각상 사이에서 멈췄던 비너스의 손이

이제는 움직이는 것 같았다.


피그말리온 2.png



각주쌀통에서 굴러 나온 설명들

– 레비 스트로스의 ‘브리콜라주’
레비 스트로스는 창조를 “발명”보다 “응급처치”에 가깝다고 봤다.

손에 잡히는 것들을 엮어 당장 쓸 수 있게 만드는 것.
M양이 찾는 ‘새로움’은 신재료가 아니라, 기존 재료의 도망이다.

우신당은 도망을 막고, 대신 재료를 다시 붙여서 쓰게 한다.

“새것을 찾지 말고, 이미 가진 걸 이상하게 써라” 그게 브리콜라주다.


–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쉬클로프스키가 말한 예술은 “더 리얼하게”가 아니라 “덜 자동으로”다.

익숙해서 눈이 미끄러지는 세계를, 다시 걸리게 만드는 기술.

피그말리온은 ‘실제와 똑같음’을 예술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더 매끈하게, 더 부드럽게, 더 사람처럼.

하지만 그 완벽함은 어느 순간 광고판의 피부처럼 “잘 보이되,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표면이 된다.

우신당은 거기서 방향을 튼다.

낯설게 하기는 흠집을 내기 위해 흠집을 내는 게 아니라, 현실의 복제에서 시선을 떼게 하는 작은 어긋남이다.

그러니까 피그말리온에게 주어진 조언은 이거다.

“똑같이 만들면 현실이 이기고, 낯설게 만들면 예술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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