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1 - <리틀 포레스트>
영화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신청하면 시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데, 거기서 제시한 첫 번째 영화였다는 것밖에. 따로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평소에 영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딱히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아는 분이 시간 나면 보러 가라고 하시는데, 마침 집 앞 영화관에서 20분 뒤에 상영하는 표가 있더라. 그렇게 즉흥적으로, 혼자 가서 영화를 봤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크레디트에 원작자가 나왔는데, 일본인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난 일본 영화 좋아하니까.
'영화가 좋았다'라고 말했을 때 '왜 좋았어?' 물으면 줄거리나 배운 점 등을 말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는 아닐 수 있다. 딱히 감동이랄 것도 없었고, 사회적인 시사점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재미있거나 속이 뻥 뚫리는 류의 영화도 아니어서.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보기 전과 후의 내가 바뀌지 않아도, 어떤 새로운 교훈을 얻거나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어져서 이내 행복해지고 마는 그런 류의 영화들. 주로 일본 영화들이 그런 것들이 많다. 이 영화도 그랬고.
첫 장면은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자전거를 타고 여유로이 따라 내려가는 혜원(김태리 분)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다음 장면은 과거를 회상하며 작년 겨울로 돌아가 눈길을 뽀드득 소리 나게 밟고 집으로 돌아가는 혜원의 뒷모습. (김태리의 영화는 처음인데, 영화 내내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도시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혜원은 시험에 떨어져 무작정 시골로 내려왔다. 도착해서 배가 고파진 그녀는 마당에 있는 배추를 캐고,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다가 불을 지핀다.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날로그 한 것들. 보고 듣고 있기만 해도 나도 자연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효리네 민박이 왜 그렇게 히트를 쳤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도 같고.
그 외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뿍 녹여낸 영화이다. 계절별로 들리는 생물들의 소리, 이를테면 새소리나 매미소리 혹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 감자를 심는 법이라든가, 논을 일구는 법이라든가. 토마토는 새빨갛게 익었을 때 다 먹고 땅에 버리면 그대로 자랄 만큼 생명력이 좋지만 비에는 속수무책이라든가 하는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들까지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온 몸이 스르르 풀어진다.
극 중 혜원의 소꿉친구 재하(류준열 분)는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다 내팽개치고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 비가 엄청나게 온 다음 날, 그가 농사짓던 과수원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런 일도 있는데 농사짓기 힘들지 않냐"는 혜원의 질문에 "적어도 사기나 아부는 없잖아."답한다. 그러고서는 "다른 사람이 열정 하는 인생은 살기 싫다"말한다. 그는 자신이 열정 하는 인생을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본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해낸다. 그런데도 잘 살고 있다.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선택지가 혜원이 아닌 내게 주어졌다면, 나는 돌아갈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기 전에 친구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했는데 평이 별로라 안 당긴다고 했다. 그 말이 은근히 신경이 쓰여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이 별로라고 할 만한 포인트를 찾으려 애썼다. 내용이 앞뒤가 안 맞나? 아니면 한국영화에선 역시 연애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농사와 관련한 지식이 잘못됐나? 농사의 힘든 점은 쏙 빼놓고 미화해버려서? 이것저것 떠올랐지만 중간쯤 가서는 ‘내가 이걸 왜 찾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너무 편안하고 마치 내가 영화 속으로 떠나온 기분,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보다 ‘내가 할 수 있을까?’가 계속 생각났다. 뒤이어선 정말 좋은 게 맞나? 착각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이유를 증명해내야 했다.
내가 좋아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이유를 대야 했다. 왜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지, 그것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지. 물론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춤주춤 빚어가는 과정에서 내 열의는 사라지기도 했다.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했을 때, 언젠가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순간이 왔으니까. '나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네.’라는 생각과 '진짜 좋아했던 게 아닌가?' 의심이 들며 덜컥 겁이 나는 순간 말이다.
어쨌든 정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이렇게 내가 있는 곳과 단절됐지만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종류의 영화(일본스러운 영화)를 좋아한다. 보고 나면 충동적으로 템플스테이를 하는 상상을 한다. 새소리에 눈을 뜨고,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고, 몇 바퀴 돌고 들어와서는 깨끗한 마루 위에 앉아 다정한 바람을 맞으며 내 앉은키만큼이나 책을 쌓아두고 하루 종일 그것만 읽는 것.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아무런 초조함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서.
그런 생각도 잠깐이고, 실행에 옮길라치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가로막는다. 얼마지? 오래 있으려면 중이 되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깎아야 하나? 지금 머리로 돌아오는 데 너무 오래 걸리니까 가발을 사야 하나? 등등. 웃기지만 그렇게 현실적인 것들은 그 크기가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내 발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결론은 ‘저건 영화지.’로 끝나곤 했고.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간 혜원과 재하가 부럽다. 그 상황보다는 용기가. 혜원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살고 있는 척’한다고 말했는데, 나도 딱 그 짝이다. 눈 앞에 놓인 선택들이 사실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것도 아닌데, 그런 것들에 매달려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돌아볼 시간들을 거기에다 쏟아부어 버린다. 스스로의 중심 없이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니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겨우 살아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중요한 것’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줘서 좋았다. (내게는 대부분의 일본 영화가 그랬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삶이라 환상적이지만 그게 마치 히어로물을 볼 때처럼 내가 그들처럼 될 수 없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아직은 용기가 없어서 어렵지만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라서 좋았다. 잡힐 듯한 환상. 이런 영화는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중심을 잡게 해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현실을 내려놓을 용기를 주지는 않지만, 지금에서 잠깐이라도 멀찍이 떨어져 생각해볼 시간을 주니까. '좋으니까 꼭 봐!'해서 보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보면 좋은 종류의 영화들.
나는 평소에 돈을 벌어야 한다든가, 능력을 쌓아야 한다든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 특히 남보다 잘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해진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 '빨리빨리’와 ‘1등’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특징 아닐까. 개인적으로 심한 편은 아니지만 은근하게 느껴지는 압박이 불쾌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잠시 잡념을 스톱하면, 마음도 여유로워져서 어떻게 잘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영화 세 가지를 추천하며, 끝!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2640
: 제일 좋아하는 영화. 주연 배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캡처해서 두고두고 읽고 싶어 지는 대사나, 입체적인 등장인물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영상미까지. 보는 내내 화면 속에 빠져들어 행복해지는 영화. 미술 천재인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퍽 즐겁다. 그들도 정해진 길을 가진 않아서.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8438
: 주인공이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인생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100만 엔씩 모을 때마다 떠나는 영화.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주인공 마인드가 좋았다. 나는 과연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지금 하는 고민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편해진다. 중간에 과수원에서 일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리틀 포레스트에서 과수원이 나올 때 겹쳐져서 생각나더라.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2665
: 사실 몇 달 전에 봤던 거라 기억은 잘 안 난다. 이런 류의 영화는 내용면에서 딱히 특이한 게 없어서일 수도 있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벅찼던 느낌이 기억난다. 주인공이 식당을 확장해서 성공시켜야지-하는 야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손님 하나하나를 챙기면서 조금의 손해도 봤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믿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나도 마냥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마냥 자기합리화에서 그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굳혀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