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해주는' 것과 이해'하는' 것
이해심은 이해해주는 것이고, 이해력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이해해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어느 하나가 우등하거나 열등한 것, 혹은 선행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의존의 관계이다. 둘 중 하나만 없더라도, 불완전한 사랑이 되어버린다.
만화 <찌질의 역사>의 주인공 민기는 잘나가고 야망있는 기자다. 7년 사귄 이해심이 많은 여자친구 가을이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 중이다.
검은색 긴생머리의 청순한 그녀는 싹싹하고, 잘 웃고, 매일 아침상을 차려주는데다 다른 집안일까지 꼼꼼하게 잘 해낸다. 민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누가봐도 최고의 신부감이랄까. 하지만 그녀에게도 커다란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세련된 스타일의 헤어 디자이너 보미는 이해력이 뛰어난 여자다. 민기가 상사 욕을 하며 복수할 거라고 하자 귀엽다는 듯 웃으며, "오빠의 목표는 앵커가 되는 거지, 그 사람을 엿먹이는 게 아니잖아?"한다. 문제에 공감함은 물론 해결책까지 제시해주는 현명함을 보고 민기는 말 그대로 뿅, 가버린다.
반면 가을이에게는 고민 토로는 고사하고, 앵커 오디션을 보게 됐다며 자랑하자 "오빠가 뭘 하든 항상 응원할게!"라는 따뜻하지만 누구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말만 되받는다. 민기는 그런 가을이에게 권태를 느끼다, 급기야 "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라?"하며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의 일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하는 응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상대가 이해력이 없는 것도 곤욕이지만, 본인이 이해력이 없는 경우도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주인공 아델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지만 본인의 개성을 죽일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파란 머리의 예술가 엠마를 만난다. 둘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급속도로 가까워져,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어느 날, 아델은 엠마의 파티에 초대받는다. 파티에는 온통 예술을 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엠마의 친구들은 아델에게 관심을 가지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지만, 아델은 답변은 커녕 질문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아델은 파티에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연신 음식 더 줄까? 음료 갖다줄까? 하며 잡일에 열중한다.
파티가 끝나고, 아델은 지친 표정으로 “다들 똑똑해 보였어. 난 교양이 없어서 좀 힘들었어.”라고 말한다. 이후에도 엠마가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열변을 토할때도, 아델은 “빵 먹을래?”하며 먹을 것을 권한다.
아델은 엠마와의 접점을 찾으려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먹을 것, 섹스 등 일차적인 욕구에 대해서만 얘기하지만 스스로도 더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
가을이와 아델의 경우 모두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즉 이해심은 있지만, 이해력이 없을 때 일어나는 비극의 사례다.
그렇다면 이해력이 이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아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둘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다. 이해력이 없는 이해심은 공허하고, 이해심이 없는 이해력은 무의미하다.
아는 동생이 갑자기 "난 이제 연상은 못 만나겠어.”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직전에 사귄 애인이 4살 연상이었는데 엄청 똑똑한 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똑똑한 모습에 반해서 사귀게 되었는데, 막상 사귀고 나니 그만한 꼰대가 없더라고.
동생이 뭔가 고민을 털어놓을라치면 일단
‘그건 네가 생각을 덜 해봐서 그런거야.’라며 설교를 시작하더란다. 그는 동생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관심 없었다. 다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러저러한 이유일 것이라 짐작하고는 해결책부터 줄줄 읊었을 뿐이다.
남일처럼 말하지만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이 사랑,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애해본 적 없었을 때부터 연인 간의 사랑에 대해 궁금해했고, 인생의 모든 초점이 그 쪽에 쏠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귀고 있었던 애인은 사랑이나 연애에 대해 나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는 종종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곤 했고, 난 그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 그와의 대화는 그를 이해하기 위함보다는,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내가 하는 생각들이 쓸모있는 것이구나, 하는 자기 위안이랄까.)
그가 내가 말한 것들에 대해 의문이나 반론을 제기하면 왜,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기보다는 ‘그게 아니라’며 내 논리를 관철시키고는, 그를 설득시키기에 급급했다. 아는 동생과 사귀었던 그 선배와 다를 게 없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인식은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정도는 몰라도, 본질적인 이해는 제공할 수 없다.
이해심 없이 이해력만 있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심과 이해력, 둘 다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한 분이 있다. 그는 ‘관계’에 대해서 매우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은 그의 앞에 서면 곧장 해결 되었고, 그럴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던 내게, 그가 상담하러 오라고 말씀하셨다. 망설이다 그를 찾아갔고, 우리는 두 시간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분명 똑똑했지만 내 문제를 곧바로 판단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데에 영향을 끼쳤을 사건들이 어떤 게 있을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셨다. 그 끝에는 내가 진짜 필요로 했던 조언을 하나 던져주시고 대화를 마쳤다.
그와의 상담에서 생각해볼 지점이 두 군데 있다.
첫 번째는 내 문제를 바로 판단하지 않으셨다는 점.
그는 단편적인 상황 설명만 듣고 내 고민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상황 너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차근차근 들어보고자 했다. 이는 상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면 생략되었을 과정이다.
두 번째는 내가 진짜 필요로 했던 조언을 던져줄 수 있었다는 점.
아무리 내게 관심을 갖고 있다해도,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면 나는 그저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만 받고 그 자리를 뜨는 순간 다시 그 고민을 반복하게 됐을 것이다.
철학자 막스 셸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정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상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는 사랑은 그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맹목적인 집착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해해주는 것(감정)과 이해하는 것(이성)은 서로 상반되는 능력 같지만 둘 중 하나가 없이는 둘 다 존재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심을 기반으로, 이해력을 향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