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아니고, 환경 보호 아니고, 건강 상 이유 아니다.
정말 뜬금없지만, 다음 주부터 주 1회 간헐적 채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달(8주)만.
사실 예전부터 채식에 대한 열망은 조금(아주 조금, 쥐꼬리만큼) 있었다. 왜냐하면 채식을 하는 사람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다양한 가치를 갖고 채식을 한다. 하지만 다른 분야보다 채식주의자가 더 멋있어 보이는 건 그들의 신념이 본인만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점 때문일테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행동은 지구에 기여를 한다. 공장식 축산을 멈춤으로써 기후 변화와 동물 학대를 줄이고 생물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만든다.(고 한다... 자세히 안 찾아봐서 잘 모르겠다만.)
이 분 덕에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https://www.facebook.com/jiin.ha.53/posts/667199306780313
하지만 나는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사진으로나 길가다 보면 '귀엽다~' 생각하긴 하지만, 그네들이 나한테 달려들어 할퀸다든지, 문다든지, 핥는다든지(!) 하는 상상을 하면 이내 부담스러워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권리, 생명의 중요성 같은 가치에도 둔감한 편이다. (그리고 내가 강아지나 고양이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닌데...하는 생각도.)
다이어트와 건강, 혹은 미용이라는 이유에도 관심이 없다. 다이어트는 할 필요가 없고(마른 체형이다) 채식을 해야 할 정도로 건강에 적신호가 오지도 않았고 미용은 다른 관리로 충분히 커버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다가 환경 보호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다. 그거 바꿔서 뭐하게? 혹은 그게 채식한다고 크게 바뀌나?정도랄까.
즉, 나는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채식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와는 접점이 없다. 그들의 가치에 공감을 하지 못 한다.
비록 내가 딱히 채식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긴 하지만, 채식하는 사람이 대단하고 멋져 보이는 건 사실이다. '힙해보여서'라는 이유로 시작을 할 수는 있겠지만,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가치를 억지로 체화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어쩌면 어이 없을만큼 볼품 없지만 나에게는 와 닿는 핑계에서 채식을 시작해본다.
뭐 먹을까?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문이라는 것에 (얼마 안 되는)전재산을 걸겠다. 음주 후 다음 날 먹는 해장 아침이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나가는 점심식사든, 친구를 만나는 저녁 식사든 어쨌든 식사 시간은 즐겁게 보내야 한다. '먹는 낙'은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이니까. 하루 세 번(적은 사람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즐겁지 않게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메뉴를 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도 어려운, 그러면서도 두려운 문제다. '결정 장애'라는 말은 메뉴를 정할 때 가장 많이 쓰일 거다. 우리는 '괜히 내가 골랐다가 식사 시간을 망쳐 버리면 어쩌지?' 혹은 '난 정말 다 좋은데 상대방이 좋아하는 건 뭐지?' 등등의 고민을 하면서 결정을 보류한다. 그런데 나는 저 질문이 좀 다른 이유로 두렵다.
나는 지독한 편식쟁이다. 내가 못 먹는(=억지로 먹이지 않는 이상 먹지 않는, 하지만 진짜로 먹지 못 하는 건 아닌) 것들을 나열해보자면,
국밥, 가지, 버섯, 해파리, 적색 채소, 아스파라거스, 아보카도, 당근, 오이, 브로콜리, 올리브, 햄버거 안에 들어있는 토마토, 완두콩, 낫또, 족발, 두유, 청국장, 건포도, 애호박(모든 호박 종류 다~ 싫다), 피클(수제 피클은 괜찮지만), 도라지, 대추, 열무 김치, 팥죽, 새싹 채소, 피망, 양배추(양상추는 좋다), 고사리, 미역 줄기, 고구마 줄기, 미역국, 붉은 살 생선, 곤약, 무 생채, 굴, 과메기, 페퍼로니, 돈까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아, 하나 더. 토마토 스파게티. (심지어 여기엔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들도 꽤 있다. 냄새나 생김새만으로 먹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국밥이나 낫또, 아스파라거스 같은 것) 이 중에 '절대 먹어서 안 되는' 건 없다. 그냥 맛이 없거나, 보기에 좋지 않아서 먹지 않는다.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나 똑같이 입이 짧은 친구들과 먹을 때는 편식하는 습관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고, 나를 만날 때만큼은 거기에 맞춰주려고 하니까. 문제는 처음 보는 사람이나 어른들과 먹을 때, 단체로 먹을 때(세 명 이상)다.
아, OO 땡긴다!
나는 이 말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저 OO에 치킨이나 찜닭, 피자, 햄버거, 냉면, 짬뽕, 초밥 등 내가 먹을 수 있는(=좋아하는) 게 들어가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다. 그러다가도 누군가 국밥(나는 국밥집을 지나만 가도 역함을 느낀다.)이 먹고 싶다고 하면 속으로 생각한다.
'망했다.'
둘이서 먹을 때야 그나마 못 먹는다 말하기 쉽지만 여러 명이서 '오늘은 국밥이다!'라고 모두 동조하는 순간 난 그만 앞이 캄캄해져버린다. 처음 먹자고 했을 때 말할 걸, 괜히 다른 사람이 별로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들떠서 국밥 먹으러 갈 때쯤엔 얼굴이 아주 잿빛이 된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내 '욕심'이란 걸 안다. 국밥을 먹는다고 나에게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까짓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 양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알량하고도 소중한 식사 시간을 사수해보겠다고 그렇게 바득바득 용을 쓰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못 먹어요'말을 하는 게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다. 메뉴를 정할 때의 편식쟁이는 그냥 편식쟁이가 아니라, 욕심쟁이가 되어버린다.
근데...아무리 그렇대도, 국밥은 아직도, 진짜 죽어도 못 먹겠다. 그래, 어쩌면 이건 국밥 알러지 정도로 취급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정신적 알러지(...)라든가. 식사 시간 동안만이 아니라 그 날 하루종일 부정적인 오오라가 끼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난 국밥을 마지노선으로, 조금 '덜' 욕심쟁이가 되기로 했다.
A: 오늘 점심 뭐 먹지? 국밥 어때요?
B: 국밥 좋죠!
나: 아... 저... 죄송한데 제가 국밥을 못 먹어서요.
A: 아, 그래요? 왜요?
나: (고개를 숙이며)아...제가 냄새 나는 음식을 잘 못 먹어서...
B: 그렇구나, 그럼 XX(내가 싫어하는 음식) 어때요?
A: 아, 저기 XX 잘 하는 집 있는데!
나: ...
여기서 "아...사실 제가 XX도 못 먹어서..."(더구나 그게 두 세번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라고 말할 배짱은 없다. 그래서 은근히 다른 메뉴를 슬쩍 대화에 밀어넣거나, 억지로 따라가 그나마 먹을만한 메뉴를 시키거나 그것도 없다면 그냥 시키고 반 이상을 남기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메뉴를 제안하기에는 또 소심하고.
그럼에도 앞에서 말한 '욕심쟁이'가 된다는 이유로, '다음 번엔 꼭 못 먹는다고 말해야지!'라는 다짐을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내가 편식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뭐든 잘 먹어'라고 말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편식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막연한 부러움을 갖고 있었다. 고로 나는 '편식하지 않기 위한' 채식을 시작하려 한다. "국밥 빼고 다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편식하는 음식들은 낯설고 어색해서가 이유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의도적인 채식을 함으로써 그 음식들에 정을 붙여보려 한다. 이는 함께 먹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음식을 먹든 식사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인 편식 극복을 넘어 채식주의자들의 가치에 공감하고,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다음 포스팅부터는 서울 내에 있는 채식 식당과 채식주의자들의 인터뷰나 그들의 생각, 채식을 지지하는 콘텐츠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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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그린을 더하다' 에드지와 함께 하는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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