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하면 매일 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그게 무슨 채식이야?
주 1회 '간헐적 채식'을 한다는 말에, 친구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겨우 1주일에 한 번 풀 먹는 게 무슨 채식이냐고. 다이어트한다고 잠깐 고기 끊는 거랑 뭐가 다르냐며. 다른 친구도 눈알을 굴리며 "음..."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치랑 밥으로 식사하는데 그럼 자기도 채식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횟수나 주기에 상관 없이, 의도를 가지고 하는 채식이라면 모두 채식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가치를 좇아 하는 채식이든, 건강을 위해 잠깐 하는 채식이든 본인의 의지로 채식을 하는 거라면.
첫 번째 친구가 말한 다이어트를 하느라 일시적으로 채식을 하는 것도 내 기준에서는 채식이다. 두 번째 친구처럼 우연히 채식을 하는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의도가 없는 채식은 일정하지도, 지속적이지도 않고 어겼을 때 패널티도 없기 때문이다.(셋 중 하나만 만족하면 채식이라고 (혼자)정의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어떤 신념을 가져야하거나 하루도 빠짐없이 풀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각자의 위치에서 본인에게 잘 맞는 방식으로, 의도한 채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주 1회 채식을 한다는 건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난 예전부터 편식하는 습관이 심했고,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그래도 반찬거리가 있으니 몇 개 집어먹긴 했지만 자취를 하고부터는 식탁에 초록색이 거의 사라진 수준이다.
지난 주 동안 먹은 음식들을 모아봤다. (사진 찍는 것을 깜빡해 빠뜨린 것도 많지만) 메뉴를 보면 라면, 3분 조리 음식, 패스트 푸드, 시리얼 등 인스턴트 음식들이 많다. 건강에 이상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여러분도 식단을 체크해보시면 생각보다 풀이 없다는 걸 알게 되실 수도!)
자취를 하니 내 식사를 따로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먹을 때가 많으니 '식사를 한다'보다는 '배를 채운다'는 느낌의 식사를 많이 한다. 한때는 일주일에 다섯 끼를 라면으로 때우기도 했는데, 밖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는 면은 무조건 피했다. (다들 내가 면을 싫어해서 그런 줄 아시던데, 실은 집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게 신경 써서 먹는 메뉴도 찜닭이나 닭갈비, 떡볶이 등 조미료 팍팍 들어간, 맛있지만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또, 친동생과 나는 치킨을 정말정말정말 좋아한다.(♥️) 같이 살다보니 일주일에도 몇 번씩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 먹는다. 동생의 이름을 '치킨메이트'로 저장해놓을 정도니 말 다했다. 가끔 채식주의자들의 얘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절대 못한다"며 고개를 젓곤 했다.
나같은 사람더러 건강해져야하니 당장 고기를 끊고 일주일 내내 풀만 먹으라는 건, 어쩌면 죽으라는 소리(...) 아닐까.
간헐적 채식은 '비욘세 다이어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2~3일은 채식, 나머지 4~5일은 일반식을 하는 방법인데 육류는 일절 먹지 않고, 탄수화물과 채소 위주의 식단을 짜는 것을 말한다. 비욘세는 이 방법으로 29kg를 감량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효리네 민박>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풀을 거의 먹지 않는 내게, 간헐적 채식이라는 개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에는 '채식한다'고하면, 먹던 치킨을 내려놓고 당장 내일 아침에 먹으려 했던 3분 짜장은 갖다 버려야 하며, 그 좋아하던 햄버거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지금까지 먹던 음식을 그대로 먹으면서, 딱 하루를 할애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니? '해볼만 하다' 생각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만으로도 채식이라는 개념은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치킨 애호가 치킨메이트(22세, 동생)씨는 자기 인생에 채식은 절대 없을 거라며, 치킨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냐고 개거품을 물었지만... 글쎄. 이 정도면 그도 제고해보지 않을까? 고기를 못 먹는 채식이 아니라, 풀을 먹는 채식 말이다.
우리 모두는 식습관이 다르다. 나처럼 편식이 심해 풀을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내 동생처럼 치킨에 미친 사람도 있고, 고기를 싫어해서 풀만 먹는 사람(엄마)도 있을테다. 굳이 모범적(?)으로 완전한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을 따라갈 필요 없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채식을 선택하면 된다. 스타벅스에서 커스텀 커피를 주문하듯, 채식도 상황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면 되는 것이다. 커스터마이징 채식! 단어도 좋잖아?
드디어 채식을 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집에서 해 먹을 짬은 안 되니 밖에서 사 먹어야 하는데, 채식하면 역시 샐러드 아니겠나. (서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다행히 샐러드 전문점이 많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인기있는 맛집도 그 수가 꽤 되는 것 같다. 이번 주는 가로수길에 볼 일이 있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VEGETABLE>에 방문했다.
근데 막상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올라간 걸 다 못 고르게 되니 정말 먹고 싶은 게 없었다. 내가 꼭 돈을 줘 가면서 풀만 있는 샐러드를 선택해야할까... 내적 갈등... 한참을 고민하다 연어 샐러드를 선택했다. 같이 간 분은 채식하면 풀만 있는 vegetable메뉴 골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내가 도저히 못 먹겠어서(...).
그러면 채식 실패한 거 아니냐고? 다행히 채식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채식을 하면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 건강에 무리가 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부분적으로 채식을 하는 방법도 있다. 심지어 폴로라는 유형은 닭고기를 허용하기도 한다.(채식주의자들은 이를 채식주의자로 분류하지 않기도 한다고.)
기재되어있지 않은 '프루테리언'이라는 유형도 있는데, 식물의 열매와 뿌리도 생명이므로 양파, 마늘 등을 먹지 않고 떨어진 열매만 먹는다고 한다. 또 '비덩주의'라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개념도 있다. 국물이 많은 음식 문화 특성상, 육수는 먹되 덩어리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내 주변에 있는 채식주의자들은 대부분 페스코 베지테리언(해산물, 우유, 달걀까지 허용)이었다. 들은 건 있어서 나도 해물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연어가 올라간 샐러드를 시켰다. 엥, 그런데 간헐적 채식을 하는 사람은 플렉시테리안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채식을 하는 날에는 비건(완전 채식)으로 식사를 하는 거라네?
...
괜찮다. 첫 주니까...
샐러드에는 오이, 당근, 양배추, 치커리, 케일 등 여러가지 채소, 간간히 문어 조각도 들어있었다. 나는 당근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고, 생당근은 더 싫어한다. 식감은 나쁘지 않은데 색깔이나 향이 마음에 안 든달까. 오이도 비빔면이나 냉면 위에 올라가는 채 썬 형태로만 먹는데, 깍뚝썰기 되어있어서 손을 덜덜대며 겨우 먹었다. 비단 나만 못 먹는 건 아닐 거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페이지도 있던데. 평소 같았으면 입에도 안 댔을텐데 그래도 먹긴 먹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숟가락을 놓았다. 연어랑 문어를 다 골라 먹어서 더 이상 먹을 게 없었다. 이게 최종본이다. 싹싹 비운 그릇 사진... 없다. 풀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양상추와 치커리만 골라 먹고, 나머지는 몇 개 집어먹다가 포기했다. 그 씁쓸한 맛을 아직은 견디기 힘들다. 오이는 가끔 먹던 거라 그런대로 많이 먹었는데, 당근은 도저히 못 먹겠어서 반 이상을 남겼다. 특히 올리브는 먹어보려 했는데 정말 못 먹겠더라.
후기를 이렇게 써버려서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나처럼 풀 자체가 어색한 사람들에게 첫 채식 메뉴로 샐러드는 조금 버거울 수 있다. 다음에 채식 고수가 되면 재방문하는 걸로.(다짐)
풀만 먹겠다고 했는데 연어만 먹었다.
식단을 찍으면서 내 식습관이 얼마나 구린지 알게 됐다. 눈으로 확인하니 충격적이었다.
채식 유형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됐다. 내가 어떤 유형인지도. (플렉시테리안)
내 의지로 샐러드에 돈을 썼다.(!)
채식 첫 메뉴로 샐러드가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라면 먹지 않았을 생당근, 생오이를 먹으려고 노력했다.
완전 채식(비건)이 아니라 페스코 채식을 했다. 다음 주부터는 완전 채식으로.
그 마저도 많이 남겼다. 다음 주부터는 최대한 빈 그릇으로 만들 것
점심 식사였는데 저거 먹고 배고파서 오후에 라면 먹었다. 한 끼가 아니라 그 날 전부 채식할 수 있도록 조금씩 확장할 것
'도심 속에 그린을 더하다' 에드지와 함께 하는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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