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54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텍스트 기반의 글쓰기가 아닌 다른 형태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유튜브와 틱톡 등의 영상 매체에서, 웹소설과 웹툰 같은 웹 매체에서, 게임과 애플리케이션, 더 나아가 메타버스에서의 자아 쓰기와 채팅형 글쓰기까지 콘텐츠 소비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글쓰기의 형태 또한 다양해졌다. 새롭게 등장한 매체들에 따른 쓰기의 서사 변화를 살펴본다.
“미디어 기술의 역사는 글쓰기가 발명된 이래로, 줄곧 중대한 혁신의 영향과 함께 전개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미디어 비평용어 21 >)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이후로 디지털 문법은 또 한 번 바뀌었다. 사용자 경험에 기반한 애플리케이션 글쓰기의 특징은 무엇인지 들어본다." - 기획회의 540호 중
애플리케이션 기반의 글쓰기, UX 라이팅이란 무엇인가? 앱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다른 글쓰기와 어떻게 다른가? 좋은 문구를 쓰는 것 외에 어떤 고민을 해야 할까?
이제 막 관심을 받기 시작한 분야라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레퍼런스가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다른 글쓰기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UX라이팅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글쓰기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공간이다.
특히 모바일의 경우 손바닥만 한 디바이스에서 같은 분량의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즉, 문장을 최대한 짧게 써서 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이동하면서 읽는 경험을 고려해서 핵심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빠르게 선택해서 읽을 수 있게 다양한 장치들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제목과 본문의 글자 크기를 다르게 한다든가, 줄글이 아닌 불릿 포인트로 스캐닝 가능한 형식으로 구성한다든가, 단락마다 요약 한 줄을 쓴다든가.
두 번째는 하이퍼링크다.
아날로그는 인용 혹은 관련 자료를 열람하고 싶으면 다른 책이나 잡지를 꺼내야 하지만, 디지털은 링크를 한 번 클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처럼 목차가 있어서 읽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이동하며 원하는 정보만 쏙쏙 뽑아 보는 방식으로 읽기 때문에 유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독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앱도 마찬가지인데, 이동이 있다는 것은 경로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유저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 즉 플로우를 고려해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앞 화면에서 나왔던 정보를 굳이 한 번 더 얘기할 필요 없고, 뒤에서 전달할 수 있는 정보를 굳이 한 화면에 욱여넣을 필요가 없다.
세 번째는 시각 자원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좀 더 생생한 시각 자료를 쓸 수 있다. 컬러를 쓰는 것도 비교적 자유롭고, 인터랙션을 줘서 조금 움직임을 줄 수도 있고, 영상을 넣을 수도 있다.
특히 앱은 컴포넌트라는 새로운 문법을 가진 시각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활용도는 더욱더 높아진다. 앱에서 글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매체가 아니라 여러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보조 수단들을 함께 사용하면 전혀 다른 형태의 글이 나올 수 있다.
UX라이터와 비슷한 직업으로 카피라이터를 많이 꼽는다.
둘은 여러 방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앱 자체에 대한 이해도다. 카피라이팅은 광고 매체별 이해가 필요하다면, UX라이팅은 디지털 프로덕트(앱)의 생태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디자인 지식을 갖고 있으면 좋다.
이를테면 버튼, 탭 바, 라디오 버튼 등 각각의 컴포넌트가 어떤 기능과 역할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면 더 적절한 문구를 쓸 수 있다. 개발 지식 역시, 알아두면 어떤 화면에서 문구를 고치고 싶을 때 리소스가 얼마나 들지 가늠해볼 수 있는 용도로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유기적인 경험 설계이다.
앱 안의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은 경험을 설계한다는 뜻이다. 광고 카피라이팅은 그 카피가 나가는 순간만 고려하면 된다. 단일 광고 하나가 하나의 제품인 것이다. 브랜드 측면에서 경험을 설계하기도 하지만, 각각의 광고가 서로의 퍼포먼스에 영향을 주도록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앱은 모든 화면 전체가 하나의 제품이다. 앱은 화면끼리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똑같은 화면에서 다른 문구를 접한다면 앱에 대한 정체성 혼란으로 인한 신뢰도 하락은 물론, 적절하지 않은 네비게이팅으로 인해 제품을 아예 잘못 사용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므로 앱은 유기적인 경험을 고려하고 화면 간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시스템적 사고이다.
카피라이터는 혼자서 일할 수 있지만 UX라이터는 그럴 수 없다. 광고 하나는 카피라이터 혼자 만들 수 있지만, 앱 하나를 UX라이터 혼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라이터가 해야 할 일은 문구를 쓸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모든 팀원들이 라이팅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문구를 잘 쓰는 것만큼, 그것을 나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들이 해낼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동일한 라이팅 기준을 갖고 일관된 텍스트를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인터콤 연구 결과, 앱스토어 내 인기 앱 25개를 분석해봤을 때 앱 안에 들어가는 텍스트는 평균 30% 정도 된다. (페이팔 같은 금융 앱은 40%까지도 간다.)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절대 라이터 혼자서 모두 쓸 수 없기 때문에, 라이터가 아무리 잘 써도 시스템이 없다면 앱 전체를 봤을 땐 언제나 깨진 유리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앱은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해서 유저와 소통한다. 컴포넌트, 글, 이미지, 인터랙션, 사운드... 작업자의 관점에서 글과 다른 요소들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이다.
이미지나 인터랙션은 기본적으로 특정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은 아무런 프로그램도 필요 없다. 심지어 쓰지 않고, 말로만 툭 던져도 그것이 하나의 프로덕트가 될 수 있다. 이미지는 "귀엽고 깜찍한 느낌의 일러스트가 필요해요."라고 말했을 때 바로 나올 수 없지만, 텍스트는 "'이것은 귀여운 일러스트입니다.'라고 화면에 써주세요."라고 말하기만 해도 바로 제품으로 쓸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글을 잘 쓰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영역으로 여겨지며 타 매체들에 비해 전문성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전문성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누구나 쓸 수 있으니 가끔은 라이터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생산되게 만들 수 있는 건 글을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의 리소스, 즉 집단 지성을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UX라이팅에서 집단 지성을 활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화면의 텍스트를 팀원과 나눠 쓴다는 것. 앞에서 말했듯 앱 안의 모든 텍스트를 라이터가 전부 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디자이너와 같은 수만큼 라이터를 채용하는 것도 굉장한 비효율.
그러나 너무 다행히,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PO와 디자이너, 개발자 등 다양한 직군이 모두 라이터를 대신해 문구를 직접 쓰고 있다. 일을 나누어 가졌으니 그 일을 좀 더 잘할 수 있게 돕기만 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라이터가 앱 안의 모든 텍스트를 볼 수 있다고 해도, (앱의 규모가 클수록) 그 화면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만큼 제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좋은 문구란 좋은 단어나 문장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다양한 맥락 정보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때, 화면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역시 텍스트라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쥐고 있는 맥락을 활용해서 좋은 문구를 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요약하자면, 애플리케이션 기반의 글쓰기의 핵심은 '같이 한다'는 점이다. 사실 모바일 글쓰기 문법을 이해하는 것은 앱뿐만 아니라 긴 글, 영상, 카드 뉴스 등 콘텐츠 영역에서도 필요한 부분이다. 앱 글쓰기가 그들과 다른 점은 하나의 제품을 여러 사람이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 같이 일관성을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UX라이터와 나머지 팀원들의 뇌를 동기화하는 것이다. 앱 안에서 좋은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UX라이터 개인의 훌륭한 문구 작성 능력을 나머지 팀원들이 동일하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위즈덤하우스 방호준 편집자님께서 이 글을 읽고 남겨주신 후기를 덧붙여봅니다. 기존 글쓰기의 도제식 훈련에 대한 관점을 남겨주셔서 인상 깊었어요.
보내주신 원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
출력해서 읽었는데, 길지 않은 글임에도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할 곳이 참 많았어요. 저는 이 기고문이 애플리케이션 기반 글쓰기가 기존의 아날로그 문법과 어떻게 다른지, 또 카피라이팅이라는 개념과 무엇이 다른지를 통해 UX라이팅이 추구하는 본질을 조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특히 '라이터가 해야 할 일은 문구를 쓸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모든 팀원들이 라이팅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는 것', 'UX라이터와 나머지 팀원의 뇌를 동기화하는 것'(미팅에서 작가님이 하셨던 말씀이기도 하죠)이라는 문구에서 글의 의의를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잘 쓸 수 있게 한다'는 지향점은 기존 글쓰기의 문법을 완전히 뒤집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글쓰기는 그동안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으로만 다뤄졌습니다. 문장 만들기는 예술이 아닌 기술이라고 오래전에 밝혀졌음에도, 모든 글쓰기 책은 글쓰기는 주관적이며 정답이 없다는 결론을 맺어왔죠.
그나마 조금 더 공적인 글쓰기는 카피라이팅이었는데, 이 또한 결국 사적인 센스 혹은 '다독 다작 다상'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결국 개인의 오랜 수련이죠.
저의 고민 중 하나는 'UX라이팅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입니다. UX라이팅이라는 낯선 개념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직관적인 콘셉트로 이해시키고 싶거든요.
저는 그 답이 기존에 사적이고 자기 수양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글쓰기의 방법론에서 적극적으로 진보된 "(잘 쓰기 위해 연습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아껴주는 글쓰기 디자인(프로세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