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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마음 Jul 12. 2020

환자권리장전

권리와 의무

환자는 병원에서 질 좋은 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환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안전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 모든 환자들은 그게 부자건 노인이건 어린이건 유명인이건 뭐든지 간에 병원에서 안전하고 최선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언젠가 한 번 내가 담당하던 환자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게 물었다. 너 몇 년 차냐고.


종종 의식이 또렷하신 환자분들은 분주하게 오가는 날 보면서 일한 지 얼마나 됐냐, 아이고 힘들겠다 하며 딸, 손녀 보시듯 봐주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를 '간호원'이 아닌 인격체로 봐주시는 따뜻한 시선에 간호사로써 최선을 다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온정 어린 대우에는 내가 아무리 처지가 어렵더라도 한 번 더 손을 대보려는 의지를 내게 되는 것이다.

내게 몇 년 차가 됐냐 물어봤던 환자분이 잘못한 것은 없다. 환자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고 자신이 받는 의료서비스의 질에 대한 의구심을 풀려는 의도였으리라.

그 환자는 자신을 맡는 간호사는 어느 정도 연차가 있어야 하며 자신이 하는 행위를 알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요구하는 사항은 두말 않고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듯했다.

그리고 맞다. 환자들은 그들의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한 번 묻고 싶다.

한 번이라도 당신의 그 권리를 얻기 위해 뭔갈 해 본 적 있느냐고.


돈을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만으로 자신은 그런 권리를 모두 가지는 것이다.

허나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상주하는 의료진의 분포에는 경험이 부족한 그룹과 경험이 풍부한 그룹이 섞일 수밖에 없는데, 당신만 기준치 이상의 무언갈 받아야 한다는 권리 의식의 출발점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어떤 환자에게 10년차 간호사가 담당으로 붙게 되면 어떤 다른 환자는 필연적으로 경험이 적은 간호사가 담당을 하게 된다.


나는 조금 더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물론이다.

하지만 현재 의료시스템은 언제든 어떤 종류의 의료사고가 나든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각박하다.


의사들은 늘 피곤에 쩔어 있다. 어제 당직을 서느라 밤을 홀딱 새우고는 또 아침 회진을 준비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자신의 일에 온전히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온 병원에서 그를 찾는다. 전화기가 쉴 틈이 없다. 71 병동, 응급실, 내과 중환자실, 원무과, 사회사업팀, 협진과 전공의.. 교수님. 그의 전화기는 그들이 화장실을 가든 어디를 가든 사시사철 울릴 준비를 하고 있다.

회진을 돌고 처방을 낸다. 다른 파트의 동기가 휴가를 가서 그 일까지 커버를 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암울한 것은 당직이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


간호사들은 화가 나있다. 컴퓨터가 먹통이고, 의사들이 컴퓨터를 다 점령해 내가 당장 차팅할 컴퓨터가 없고, 오늘따라 장비들이 다 고장 나서 일이 진행되지 않고, 환자 바이탈은 안 좋은데 담당의사는 전화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처리해야 할 보호자들 요구 사항에 퇴원을 앞둔 환자를 두고 원무과와 한바탕 신경전에다가 퇴원하면 또다시 누군가의 입원을 준비해야 한다. 와중에 신규 간호사와 함께 일을 하느라 눈과 머리가 쉴 틈 없이 돌아다닌다. 콧김을 뿜어대며 병동을 휘젓고 키보드를 휘젓는다.


음주운전은 자살행위라고들 한다.

그런데 의사들은, (특히 비인기과들은 특히나 더)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만성피로가 있다. 그런 상태에서도 여기저기 타박을 들어가며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애를 써본다.


간호사들은 전투적인 근무환경 때문에 소진되어 어느 정도 일을 할라치면 병원을 떠난다. 환자가 누울 병원의 병상 갯수 몇 개당 배치되는 간호사의 수가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경력있는 간호사가 10이 나가면 그 중 어느 정도는 경력 간호사로 채우지만 그 빈자리를 메꾸는 건 대부분 신규 간호사다.

그리고 그 많은 신규 간호사를 교육할 선배 간호사의 자리는 뻥 비었다. 결국 근근히 남아있는 간호사가 그들의 업무에 연달아 교육이라는 업무까지 짊어진다.

신규 간호사는 아직 자기가 충분히 준비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독립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피곤한 간호사가 얼만큼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병원은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만 여건이 그렇질 못하다. 인프라가 없는 상태에서도 기준치를 충족하려면 결국은 현재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밖에.

하지만 그 인프라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었다.

- 잠 못 잔 의사가 열정과 소신을 불태워 병원의 환자를 케어한다.

- 일이 그저 무서운 신규 간호사가 환자를 보게 된다.

- 번아웃 직전의 경력 간호사는 참을 만큼 참으며 환자를 본다.


우리는 이렇게 되려고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다시 물어본다.

병원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날 담당하는 간호사를 바꿔라 말한다.

어떤 사람은 간호조무사, 간호사 난 다 상관없고 의사나 불러오라 말한다.


이런 것은 권리 주장이 아니다.

본질적인 환자의 권리 주장은 그들의 안전할 권리를 근거로 해서 더 나은 병원을 만들어내기 위한 행동, 그것이 제일 먼저 시행되어야 할 환자의 권리 주장이다.


간호사는 자신이 맡은 환자는 동등하게 간호해야 한다.

다만 그 간호사가 피곤에 찌들어 있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간호사 개인에게만 부담 지울 일이 아니다.

당연한 환자의 권리를 위해 당신들이 나서야 한다.

더 나은 병원의 경험을 위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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