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솔로 향하는 날
'쾅! 쾅! 쾅!'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커튼에서 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두 컴컴한 실내를 더듬거리며 현관문으로 갔다.
문을 열자 낯선 외국인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아, 그쪽에서 보면 내가 더 낯설지도.
밝은 갈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홍조를 띤 것으로 보아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진한 향수향인지 보드카 향인지 모를 향이 현관을 타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내 얼굴과 방문에 적힌 호수를 번갈아 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제스처를 하곤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궁금했지만 잠이 덜 깨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길게 늘어선 복도는 여전히 적막만이 흘렀다.
방에 들어와 스탠드를 켜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4시 반, 좋은 호텔의 모닝콜 서비스는 참 요란하다 생각했다.
스탠드를 끄고 호텔 침구에 머리를 파묻어 봤지만, 다시 잠에 들 것 같지 않아 복솔로 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어제 공항에서 민박집 사장님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예약이 되어있는데, 비행기가 연착돼서 오늘 못 갈 것 같은데 어쩌죠?"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신 거라면 지금 시간에 여기로 올 수 있는 대중교통은 없습니다. 근처에 숙소를 잡으시고 내일 오세요."
어딘지 모르게 차갑다고 느껴지는 사장님 말투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이곳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한인 민박이다.
오랜 여행에서 지친 한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의 음식이 그리워서, 한국사람이 그리워서, 낯선 외국인과 지내는 것은 힘들어서 찾는 곳이었다.
대체로 한인 민박은 숙박료가 굉장히 저렴하고 조식으로 한식이 제공된다.
숙소 정보에 빼곡히 적힌 주의 사항만 보더라도 여기 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짐작이 갔지만 계획한 여행지 근처에 마땅한 숙소가 이곳밖에 없었다.
숙소는 램버스 지구의 복솔이란 곳이었다.
호텔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복솔까지 찾아가는 일은 어제 맞을 매였지만 오늘 맞아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호텔 밖으로 나와 정류장으로 향했다.
도착해도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남아, 복솔역 근처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어제 비행기에서 받은 쿠키로 간단히 배를 채우며 정류장을 찾았다.
버스는 한 번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야 할 번호에만 집중했다.
잠시뒤 시간 맞춰 버스가 도착했다.
짐이 많아 같이 기다리던 사람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나는 나중에 버스에 올랐다.
카드를 찍고 자리를 찾으려 시선을 돌리는데 단말기에서 경고음 같은 것이 들렸다.
몇 번 다시 시도해봐도 상황은 반복 됐다.
버스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다. 어제 공항에서 오는 버스에서는 문제없었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잠깐 카드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이 들어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20분마다 1대씩 오는 버스를, 2번을 더 보내고는 문제 해결에 나섰다.
내가 가지고 간 카드는 후불 방식이 아닌 충전 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어제 충전을 하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는 바람에 카드가 정지되었다.
충전을 하면 10~20분 이내에 카드를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문구를 확인하고 충전을 했다.
4번째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다.
이미 호텔을 나선 지 한 시간이 넘었다.
당황해 허둥지둥 하느라 가방이 무거운지도 몰랐다.
버스에 오르려고 다리를 딛는 순간 엄청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카드를 갖다 대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무언의 통과 인사를 버스기사와 나눈 후 2층으로 향했다.
2층 앞 좌석에 짐을 풀어놓았다.
가방의 어깨끈 선을 따라 옷이 젖어 있었다.
가방을 풀고 창 밖을 바라보니 어젯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동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제 도착했던 히드로 공항도 보였다.
도로에 있는 자동차, 건물 그리고 사람들까지.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에 여행을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 역까지는 20분 정도 소요 되어, 그 시간 동안 마음을 놓고 주변을 구경했다.
구경을 하면서 구글맵으로 버스가 가는 방향을 계속 확인했다. 두 정거장 전쯤 가방을 챙겼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허리끈과 어깨끈을 꽉 매지 않으면 오랜 시간 서있을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기차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을 확인하고 기차를 기다렸다. 날씨가 우중충 하니 영국이란 것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평일 아침이라 시내 중심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는 줄 알았지만 지하철보다는 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차였다. 북행과 남행을 잘 구분해 타야 했다. 잠시 뒤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가 내 앞에 멈추길 기다렸다. 플랫폼 번호와 기차에 쓰여있는 목적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 기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옆칸에서는 문이 열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차 시간이 긴 열차를 놓치면 번거롭겠다 싶어 옆칸으로 뛰어 기차에 올랐다.
유럽에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승객이 직접 문을 열고 내려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버스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가야 하기에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손에서 구글지도는 놓지 못했다.
내 몸 만한 짐들을 빨리 안전한 곳에 놓아두고, 가벼운 가방을 챙겨 나와야 이 창밖의 풍경들도 온전히 내 것이 될 것 같았다.
창밖엔 어느 순간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차 안,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도심에 가까워 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기차에서 내릴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짐을 미리 챙겨 문 앞에 섰다.
이번엔 꼭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솔역엔 오피스와 주거 공간이 밀집된 곳이라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붐볐다.
그 속에 어색한 표정을 짓는 커다란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다.
출구번호가 따로 없어, 한 곳으로만 나가도 되니 마음이 편했다.
도착한 복솔역은 복잡했다.
역 앞에는 버스 터미널도 같이 있는 듯했다.
교통이 좋은 도시라고 들었다.
그만큼 사람도 많아 아침부터 활기가 있었다.
기차에서 미리 찾아둔 스타벅스로 향했다.
아침 겸 점심을 계획했지만, 교통카드 이슈로 확실한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침시간 스타벅스에도 사람이 많았다.
적당한 샌드위치를 하나 골라 카운터에서 커피를 구매했다.
계산 후 이름을 물어보는 것 같아, "Jason!"이라고 대답했다.
유럽에서 처음 먹는 커피는 스타벅스였다.
익숙하다는 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지금 보니 To go라고 적혀있다.
포장하겠다 하고 테이블도 많이 없던 저곳에서
2시간을 있었다. 경황이 없던 터라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이름이 정확히 쓰여 있는 커피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얼리 체크인을 기대했지만 사장님의 단호한 어투에 시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구글 맵으로 배터리가 한계에 다다른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카페에 앉아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람구경도 했다. 아침부터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사람도 많았다. 런던 도심의 카페에 앉아 있으니 나도 뭔가 바쁜 척 비즈니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체크인 시간이 되었다. 사장님께 연락드렸더니 약도와 열쇠 위치를 알려주셨다. 추가로 방번호를 알려주시면서, 마음에 드는 침대에 짐을 풀라고 하셨다. 숙소는 스타벅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시 짐을 챙겨 나와 숙소로 향했다. 이제 안전한 곳에 짐을 풀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걸음이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복솔역 옆에 있는 굴다리를 지났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매캐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좋은 것은 향기지만, 그것은 확실히 냄새였다.
내 걸음걸이로 굴다리를 금방 지날 수 있었지만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굴다리 안에는 노숙자들이 박스나 담요 등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술병이나 음식물 쓰레기들이 함께 있었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에도 노숙자들이 이렇게 많다니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역을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굴다리를 지나 복잡한 횡단보도를 건넜을때 사장님이 보내주신 약도에 표시된 타코집이 있었다.
타코집 옆으로 익숙한 모양의 대문을 발견했다.
보물상자를 열어야 할 것 같은 낡은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숙소 안은 조용했다.
오른쪽으로 길게 계단이 있었고, 왼쪽으로 난 1층 내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방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과 계단, 지나쳐 왔던 문까지 주의 사항들이 메모되어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은 외국인 숙박업이 불법이었다.
여행객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사장님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몰랐을 때 제약이 많은 숙소의 인상은 당연히 좋을 수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화장실 앞에 있는 호수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창가 쪽 침대에 짐을 풀었다. 잠귀가 밝은 나는 2층 침대는 불편할 것 같았다. 할머니 집에 놀러 온듯한 향수를 일으키는 꽃무늬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벌써 방에는 몇 명의 한국인 여행자들이 묵고 있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침대에 앉아 방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텔이 그리웠다.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내 물건을 한쪽에 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박자였다. 방문은 물건 분실을 위해 꼭 잠그고 있으라는 사장님의 당부 때문에 들어오자마자 잠가놓은 상태였다.
나는 일어나서 방문으로 향했다.
조금 늦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누군가 방문을 더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