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도피.
5년전 나는 제주도로 도망쳤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가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인생이 게임처럼 리셋버튼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곳이 꼭 제주도일 이유는 없었다.
단지 가장 먼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삶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을 부정했다.
이제 막 30대를 시작한 나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넌 너무 복잡한게 문제야."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생각 좀 그만해."
"정신좀 차려."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
하고 싶은건 많았지만 특출나게 잘하는건 없었다. 끈기도 없었다.
조직 생활에서는 참지 못하고 문제 제기만하는 모난 돌이었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렸고, 작은 일은 하찮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남들과 다를거라는 무모한 기대와 자신감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에 부딪히면서 망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내 직업을 속이고, 허영심에 빠져, 돈도 계획없이 펑펑 썼다.
카드 빚은 늘었고, 직장을 다니는데도 그 빚을 메꾸지 못해 어머니는 30대가 다 되가는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나를 사랑해줄 존재를 찾아 연애도 많이 했지만, 독립적이지 않은 어른의 사랑이 괜찮을리 없었다.
사람들을 속이는건 더 대범하고 자연스러웠다.
가장 무서운건 나도 내게 속고 있었다.
저녁마다 불안함과 허무함이 밀려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의 대단하지 않은 진짜 모습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었다.
생각의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나의 내일을 또 망치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왔을때 나는 여전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작은 회사와 아르바이트를 전전 하면서 30대 중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허영심을 아직 버리지 못했는지, 인생에 어떤 타이틀이 또 필요 했는지, 남들보기에 부러움을 사고 싶었는지
나는 3개월간의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장 먼저 달력을 보았다.
제대날짜를 기다리는 군인의 설레는 마음이 아니었다.
방 한켠엔 6개월은 족히 버틸 수 있는 커다란 배낭이 여행의 불안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이것 저것 챙기다보니 가방의 무게는 점점 늘어갔다.
계획을 세네번 체크해서 이미 가본곳이 아닐까라는 착각까지 들었다.
제주도일 때도 그랬지만 남들에겐 신나는 여행이 나에겐 '도망'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것을 끝으로 좀 달라져보자.'
'끈기를 가지고 뭐라도 하자.'
'제발 인간답게 살자.'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압박과, 한편으로는 알량한 기대감은 여행날짜가 다가오면서 눈덩이 처럼 커져 나를 덮치고 있었다.
5년전 나는 제주도로 '도피'했다.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책임으로부터 '도피'했다.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도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회피했기 때문에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행이 '도피'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정면으로 맞서길 바랐다.
매일밤 생각에 꼬리를 무는 시간에서 자유롭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