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슈퍼스타들

빅벤과 런던아이

by Jason

문을 열자 긴 머리를 포니테일 한, 덩치 좋은 아저씨가 서 있었다.

머리를 대충 묶었는지 고무줄이 데려가지 못한 몇 가닥 머리카락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어제 비행기가 연착 됐다면서요?"

"아, 네. 사장님 이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짐 풀고 침대 머리맡에 안내사항 잘 한번 읽어봐요. 그리고 숙소 바로 앞이 화장실이에요. 샤워할 땐 꼭 커튼을 치고 밖으로 물이 안 세게 주의해 주세요."

생각보다는 상냥한 말투에 놀랐지만, 사장님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했다간 머무는 동안 골치가 아플 것 같아 나도 사람 좋아 보이는 척 웃으며 대답했다.

"조식은 아침 7시부터 8시까지에요. 식사할 거면 전날 저녁 9시까지 저한테 문자 주세요."

"아, 전 무조건 먹을게요."

"네. 문자 주세요."


사장님이 떠나고 안내 사항을 읽어보았다.

퇴실 후 짐보관 하는 시간대와 가격이 어떻게 되는지, 체크인 당일을 제외하고는 필수 외출시간이 있다는 것, 아파도 나가야 하는데 정말 아파서 숙소에 있어야 하는 경우 10파운드를 지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입실시간, 퇴실시간, 조식 시간 엄수할 것 등 작성해 놓은 규칙을 어기면 일정 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안내 사항 어기지 말고 여행경비 아끼세요.'라는 친절한 문구와 함께.

고등학교 학생 주임 선생님이 유럽여행까지 쫓아왔나 싶었다.

다행히도 두발규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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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사항 뒤에는 숙소 근처의 편의 시설, 음식점들이 적혀 있었다.

사장님께서 외국 생활이 오래되셨는지 어딘가 어색한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대학시절, 휴학을 하고 기숙사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다.

방학 기간 동안 기숙사 학원에 들어와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학생들을 통제하려면 규칙이나 약속이 필요했다.

보통은 규칙보다 약속이 그들을 설득하기 쉬웠다.

어떤 행동을 조심해 준다면 자습시간 30분을 줄여줄게라던가, 오늘 자습을 2시간 더 한다면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간 자유시간을 줄게 등.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상대방의 요구 조건과 나의 요구 조건을 등가 교환하는 방식의 약속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일방적인 규칙은 학생들의 반항심을 이끌어 냈다.

사장님의 통제가 염려였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성인인 나조차 마음 한 곳에서 괜한 반항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입실한 날에는 숙소에 있어도 괜찮지만, 주변을 산책하기 위해 가벼운 짐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방문과 숙소 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복솔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아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길거리의 사람들 중에 우산을 챙긴 사람은 없었다.

영국 사람들은 웬만한 비는 우산 없이 맞고 다닌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숙소 근처의 템스강을 따라가다 보면 빅벤과 런던아이를 볼 수 있다.

템스강은 런던의 역사뿐만 아니라 영국 전체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강 주변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도시 간의 물자를 나르는 역할을 했다. 강을 따라 침략이나 약탈을 당하기도 했지만,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축이 되었다. 템스강은 서울에 있는 한강보다 폭이 좁다. 한강은 전 세계 도시에 있는 강 가운데 폭의 넓이로는 나름 상위에 속한다.

템스강은 폭이 좁은 만큼 도시 간의 교류가 활발했고, 발전속도가 빨랐다. 폭이 약 2km 정도 되는 한강은 걸어서 건너기에는 다소 길다고 느껴진다. 템스강의 폭은 약 250~300m로 걸어 다니기에 적당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큰 배가 다니기 어려워 대규모 무역항으로는 발전할 수 없지만 여행자들이 걸어 다니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덕분에 도시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다. 그리고 랜드마크도 폭이 좁은 강을 따라 만들어진다.




템스강을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깅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먹이를 주며 도시에 있는 비둘기를 전부 소환할 태세인 비둘기 조련사도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에 어제 불안했던 마음이 씻겨져 내려갔다.

무엇이 불안해서 그렇게 걱정했을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임에 틀림이 없는데.

살면서 그런 불안들을 몇 번 겪었지만 매번 똑같은 걱정을 하곤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빅벤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파에 휩쓸리기 싫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한쪽 벽에는 아시아인 단체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빅벤이 강 너머로 보이는데, 잘못된 방향의 기념사진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벽을 들여다봤다.

수천 개의 하트 속에 어떤 메시지들이 적혀 있었다.

메시지를 읽어보니 코로나가 창궐할 때 사망한 영국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벽화형 기념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에 추모형 기념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단순히 예쁜 벽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엔 마음이 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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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가니 빅벤의 정면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주 전에 왔던 친구들은 공사 중이어서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공사가 끝났는지 장엄한 모습으로 템스강 앞에 서 있었다.

템스강의 진정한 주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면서 빅벤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 시간이 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윤곽선이 더 뚜렷해져 아름답게 보인다.


사실 빅벤은 타워의 이름이 아니다. 타워 안에 있는 종을 빅벤이라고 한다. 종과 시계를 품고 있는 탑은 엘리자베스 타워이다. 엘리자베스 타워 안에는 총 5개의 종이 있다. 우리가 흔히 빅벤이라 알고 있는 큰 종은 매 시각을 알리기 위한 용도이고 나머지 4개의 종은 15분마다 쿼터 차임을 연주한다. 웨스트민스터 차임이라는 유명한 멜로디는 흔히 벽시계나 스마트폰 알림으로도 사용된다.


우리는 빅벤을 보고 왔다 말하지만 사실 시계탑 안에 있는 빅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빅벤은 소리로 느껴야 한다.

어쩌면 '빅벤을 보과 왔다' 보다는 '빅벤을 듣고 왔다'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빅벤을 여러 각도에서 구경하다 관광객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런던아이로 향했다.

빅벤과 런던아이는 웨스트 민스터 브리지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런던아이로 향하는 중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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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아이 뒤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할 장관에 영국 관광청에서 준비한 이벤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무지개 덕분에 빅벤보다 런던아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내 사진을 잘 찍지 않지만 외국인에게 부탁해 무지개가 뜬 런던아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무지개가 없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동양에서는 종종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은 곧 재앙이 찾아올 거라는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서양에서는 무지개 끝에 황금 항아리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대에 그냥 항아리도 아니고 황금 항아리라니.

N의 상상력을 팩트로 폭행하는 사람들은 무지개의 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잡을 수 없는 환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행의 시작에 무지개를 봤다는 것에, 이번 여행이 나에게 여러 의미로 특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빅벤을 듣고, 런던아이를 보았다.

여행이라는 무지개의 끝에 있을 나의 황금 항아리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IMG_8142.JPG 빨간 버스와 빅벤 뒤로 지는 노을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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