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완성 시키는것

풍미

by Jason

여행 출발 몇 주 전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런던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축구팀이 있는 친구는 아무래도 영국 여행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친구의 아내는 잘 알지 못하는 축구를 보러 2박 3일 동안 끌려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8할을 축구 이야기로 도배하던 친구의 런던 이야기 중 내 귀에 꽂히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타워 브리지가 보이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동네 조그만 사거리가 보이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는 먹어봤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타워브리지라면 그 햄버거, 먹어보고 싶었다.

파이브 가이즈라는 햄버거 집은 처음 들어봤지만 친구가 강력 추천해서 구글 맵의 어떠한 랜드 마크들 보다도 우선적으로 계획했던 곳이었다.

타워브리지를 보면서 햄버거를 먹는 낭만이라니.

숙소에서 타워 브리지까지는 8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비가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았지만, 런던을 더 깊고 천천히 담아가고 싶은 마음에 걸어가기로 했다.




런던아이 앞에 비둘기와 함께 앉아 버스킹을 구경하기도 하고, (녀석은 버스킹이 아닌 내 와플을 구경한 것 같다.) 템스강 너머의 건물들을 보며 사진도 찍었다.

유람선을 타고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강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로의 여행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템스강을 옆에 두고 걸으며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 보니 금방 타워브리지가 보인다는 파이브 가이즈에 도착했다.

대기줄이 길게 늘어진 만큼 주방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식과는 거리가 먼 나라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건 결국 패스트푸드의 햄버거인가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짧아 보이는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버거와 버거 안에 들어가는 토핑을 골랐다.

감자튀김은 어떤 사이즈로 할 거냐는 질문에 먹성이 좋은 나는 미디엄이라고 말했다.

스몰은 너무 적을 것 같다란 판단이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 타워브리지가 보이는 2층으로 올라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뒤 종이백에 담겨있는 버거를 들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종이백을 열어본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종이백에 가득 들어있는 감자튀김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디엄 사이즈는 4명이 적당히 먹을 정도의 양이라고 했다.

평생 먹을 감자튀김을 여기서 다 먹고 다시는 감자튀김 앞에서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햄버거도 버거킹의 큰 버거 사이즈만큼이나 컸다.

정상인건 콜라 밖에 없었다.


IMG_8397.heic


한참 레고에 빠져있을 때 타워브리지를 조립한 적이 있었다.

그땐 영국에 와보지 않았고, 당연히 타워브리지도 보지 못했지만 엄청난 수의 피스 (piece)를 조립하면서 가슴이 웅장해졌던 기억이 있다.

피스 수가 많다 보니 완성된 실제 사이즈도 꽤 컸다.

책장 위에 두고 언젠가는 런던에 가서 타워브리지를 지나는 빨간 버스를 타야지 생각했다.


빨간 버스를 타며 그 밑을 지나진 않았지만 타워브리지를 보면서 햄버거를 먹겠단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 주었다.

질려버릴 것 같은 감자튀김은 적당히 먹고, 자리를 정리했다.

타워브리지를 가까이 보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산업 혁명 이후로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단순한 기계의 발명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이 뒤바뀐 변화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맨체스터, 버밍엄 같은 공업 도시가 급성장했다.

훗날 이런 공업 도시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유명한 명문 축구 클럽들이 탄생했다.

영국의 도시들 간에는 사회, 경제, 문화가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다름은 서로 간의 경쟁을 야기해, 도시의 축구팀들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절 해양강국이었던 영국은 식민지에서 원료를 들여오고 완제품을 수출하는,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풍부한 석탄과 철광석으로 산업 기계와 증기기관을 발전시켰다.

특히 증기기관은 산업의 심장 역할을 했다.

운송과 수송이 발달하면서 템스강을 중심으로 물자가 활발히 교류되었다.

이때 인구와 교역량이 급격하게 늘면서, 템스강을 건너는 새로운 교통로가 필요했는데, 템스강은 당시 항구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들어 올릴 수 있는 다리인 '도개교'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타워 브리지이다.


IMG_8394.heic


사실, 타워브리지를 배경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템스강 주변으로 많았다.

타국까지 와 햄버거를 먹을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영국에는 영국을 대표할만한 음식이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밈이 생겨난 이유도 산업 혁명과 관련이 있다.

도시로 몰린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가 되어 하루 종일 일하며 짧은 식사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음식은 단순히 노동을 위한 '연료'였고, 맛보다는 편리함과 포만감이 중요했다.

온난습윤한 해양성 기후라는 점도 한몫한다.

이러한 기후는 강한 향신료의 발달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신선한 채소, 과일보다 보존이 쉬운 감자·밀·콩·육류 위주의 식단이 주가 되었다.

나에게 피시 앤 칩스,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매쉬드포테이토 등의 음식은 미식이라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영국의 음식은 결정적으로 풍미를 내줄 무언가가 없었다.





타워브리지 주변을 한참 돌며 사진을 찍다 보니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조금씩 소화됐다.

아니, 남아있는 건 감자튀김이 분명했다.

사우스 워크를 지나, 이번에도 역시 걸어서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다.

버로우 마켓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대의 들어와서는 이곳이 미식의 중심이라고 한다.

신선한 식재료와 다른 나라의 여러 가지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버로우 마켓에 유명한 피시 앤 칩스 가게를 찾아갔다.


가게 주변에는 기름냄새가 향긋하게 퍼지고 있었다.

파이브가이즈에서보다는 좀 더 긴 줄을 기다려야 했다.

줄의 끝에 가서 팔짱을 끼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이 가게 줄 맞죠?"

뒤를 돌아보니 세련된 흰머리에 흰 수염, 무엇보다 듣는 순간 누구나 다 아는 목소리.

배철수 님이었다.


"아, 네. 맞습니다."

당황스러운 나는 짧은 대답만 하고 순간 어떤 말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내 용기를 내서 말을 이어갔다.

"사모님 하고 여행 오셨나 봐요. 즐거운 여행 하세요."

"젊으니까 이런데 찾아오는 거 쉽죠? 우린 시장 입구부터 한참을 헤맸어요. 나름 여길 몇 번을 왔는데. 올 때마다 처음 오는 것 같아."

"하하. 낯선 곳이니까 저도 쉽지 않아요."


뭐라 할 말이 많지는 않았다.

줄이 꽤 길어 오랜 시간 앞뒤로 서 있어야 했고 어색한 공기가 싫어, 부자연스러운 '라디오 잘 듣고 있어요.', '완전 팬이에요.' 같은 탄로 날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어 피시 앤 칩스를 받아 배철수 님 내외분께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찾았지만 가게 내엔 남은 테이블이 없어서 가게 밖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도 타이밍이 맞게 안쪽자리가 나 배철수 님 내외분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피시 앤 칩스는 맛있었다.

여유롭게 앉아 맥주를 함께 먹고 싶었지만, 아직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춘천을 가면 명동 닭갈비 골목에 들러 닭갈비를 꼭 사 먹는다.

속초를 가면 시장에 들러 닭강정을 꼭 사 먹는다.

특별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건 아니지만 장소와 추억, 함께하는 사람들, 그 외 여러 가지가 그 경험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것이 여행을 특별하게 기억하도록 만드는 '풍미'일까.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동경하던 랜드마크를 바라보는 것.

피시 앤 칩스의 맛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 우연한 만남.


그것들은 평범한 영국 음식을 오래 기억하게 만들어 준 '풍미'였다.

keyword
이전 05화내서널 갤러리 - 빈센트 반 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