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팅힐'
걱정과는 달리 복솔의 숙소에서는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샤워실은 머리카락이 하수구에 끼어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를 닦거나 손을 씻으러 세면대 쪽으로 가려면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배를 집어넣고 지나가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화장실인가, 던전인가.
현대사회에 나의 위생상태를 관리하는 일이 이토록 힘들다니.
침대 이불은 턱없이 짧았다.
밤마다 양말 2개를 신고 자지 않으면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에 잠에서 깼다.
일정을 다녀와서 숙소 안의 청결상태를 보면, 여행자들을 밖으로 쫓아내는 시간이 청소를 위함인지 의심스러웠다.
적응 못한거구나..
다행히 다음 일정을 위해 숙소를 옮겨야 했다.
숙소는 킹크로스역 근처에 있었다.
또다시 무거운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숙소보다 이 도시 자체에 적응했는지 가방의 무거움이나 긴장감이 덜 느껴졌다.
조금씩 내리는 비도, 흐릿한 날이 많은 하늘도 모두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방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언더그라운드로 걸어갔다.
킹크로스역은 우리나라의 서울역만큼 큰 역이다.
많은 노선이 지나고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킹크로스역에 내려 숙소를 찾았다.
역에서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숙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골목에 바이올렛색 대문은 그 숙소 밖에 없었다.
현관문을 두들기니 젊은 남자가 나와 친절히 내 가방을 받아 주었다.
"고생하셨어요. 찾느라 힘들진 않으셨어요?"
어딘가 순박해 보이지만 이미지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굉장히 씩씩하게 느껴졌다.
"방은 이방 쓰시면 돼요! 화장실은 위층에 있고요. 부엌은 옆에, 필요한 건 말씀하세요."
나는 또 창가 쪽 침대에 짐을 풀었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는 것은 모두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여기저기를 관찰하려는 나의 심리인 것 같다.
짐을 대충 침대 위에 뿌려두고 스텝 친구가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방에 손님이 좀 있나요?"
"아니요. 아무도 없어요. 편하게 쓰시면 돼요!"
다부진 몸에 순수한 얼굴을 하고, 평상시 목소리 데시벨이 굉장히 높은 이 친구는 게스트하우스 스텝일을 하며 런던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크로스핏 운동선수인데, 순간 힘쓰는 운동을 많이 해 소리를 하도 질러대서 목소리가 커졌다고 한다.
나는 귀가 예민한 편이라 큰소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친구와 대화하는 건 불편하지 않았다.
친구의 이름은 승현이었다.
승현이는 내가 머무는 동안 나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게스트는 빨래가 불가능하지만 장기 배낭여행을 한다는 내 포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의 세제도 내어주거나 스스로 세탁해 주기도 했다.
단백질 보충이 자주 필요한 승현이는 내가 머무는 동안 소고기등을 사 와 내 저녁도 함께 챙겨 주었다.
나는 숙소에 머무는 동안 승현이와 저녁식사 후 동네 산책도 종종 했다.
다른 나라에 와서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승현이가 기특했다.
승현이와 나는 나이차이가 꽤 났는데 뭐든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는 승현이를 보면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현아. 너랑 있으니까 가끔 여행 온 걸 잊게 돼서 안 되겠어. 이 근처 괜찮은데 추천해 줄래?"
"형님. 영화 노팅힐 보셨어요? 노팅힐 촬영지가 이 근처인데 구경하고 오세요."
마침 런던에 자주 없는 햇빛이 쨍쨍한 날이었다.
빛을 받은 파스텔톤 건물들과 포토벨로 마켓을 구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마침 토요일이라 포토벨로 마켓도 활기찰 것 같았다.
좋은 날에만 들고나가는 카메라를 챙겼다.
노팅힐에 가서 보토벨로 시장을 구경하고, 시장에서 간단한 점심을 포장해 하이드파크에서 먹을 계획이다.
걸어서 가기엔 거리가 꽤 되었지만 맑은 날씨의 희소성을 생각하면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솔과는 다른 느낌의 도시를 걷는 느낌이었다.
복솔은 조그만 소도시라면 킹크로스역 근처는 대도시의 느낌이었다.
나는 여행할 때 걷는 게 좋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공간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공간은 사진도 찍고,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내가 지나온 거리를 다시 바라보면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도 보인다.
킹크로스역 근처엔 복솔에서 봤던 것보다 더 많은 노숙자가 있었다.
영국은 주택공급의 문제나 이민자 문제등이 복잡하게 얽혀 정부 차원에서 지원 제도를 많이 만들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노팅힐 거리 근처에 도착하니 걸어오면서 보았던 한적함은 사라졌다.
관광객들이 파스텔톤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구글맵을 보지 않아도 어디가 포토벨로 마켓인지 알 수 있었다.
영화의 촬영장소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실제로 주거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피해가 갈까 봐 걱정됐다면 내가 T일까..
집 앞에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반길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런던의 노팅힐 거리에서 작은 여행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그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가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애나 스콧이 우연히 들어온다.
두 사람은 우연한 커피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지고 비밀스럽고 따뜻한 사랑이 싹튼다.
그러나 서로가 사는 삶은 너무 다르다.
그녀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그는 이름 없는 서점 주인.
사랑은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리지만, 마지막에 윌리엄은 영국을 떠나려는 애나 스콧의 기자회견장으로 달려가 온 세상 앞에서 마음을 고백한다.
여성향 로맨스는 많이 봤지만 이 영화는 내가 처음으로 본 남성향 로맨스다.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스토리이다.
평범한 삶을 사는 남자가 슈퍼스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니.
윌리엄을 부러워하는 남성들이 많았을 것 같다.
윌리엄이 운영했던 서점은 촬영이 불가능했다.
명품 매장 방문하듯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는 듯 보였다.
나도 줄을 섰다가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오래된 서점의 습한 냄새, 종이 냄새가 섞여 포근한 향이 났다.
여행 서점답게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구매하고 싶었지만 배낭의 무게가 걱정되어 포기했다.
포토벨로 시장은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은 건 좋아하지 않지만 시장을 구경하는 데엔 취미가 있다.
벼룩시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모아두었던 애장품을 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많았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아 중간중간 정체가 되는 구간들이 있었다.
덕분에 천천히 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이드 파크에 가져갈 점심거리를 찾아다녔다.
큰 철판에 고기랑 야채 등을 볶아 용기에 담아주는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메뉴를 고르고, 기다리던 중에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지갑을 숙소에 놓고 온 것이다.
가방이나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도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올 때 버스를 타고 왔더라면 출발 전에 이미 지갑의 존재를 눈치챘을 텐데.
점심식사가 걱정이 된 건 아니었다.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이미 꽤 오래 걸은 터라 다리가 아팠다.
점심식사는 포기하고 다음 일정까지 고려해 하이드 파크로 얼른 발길을 돌렸다.
하이드 파크를 들렀다 숙소로 가는 길이 막막했다.
이미 워치에 찍힌 걸음수는 2만 보가 넘었다.
자기 전에 발을 충분히 풀어주지 않으면 다음날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여행할 때 여행지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직접 골라 듣는 걸 좋아한다.
포토벨로 마켓을 빠져나와 다시 파스텔톤 건물들이 서있는 곳을 지날 때 김동률의 노래를 들었다.
김동률의 노래와 어우러져 더욱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김동률의 노래에 심취해 한참을 걸어 하이드파크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공원에 대한 의미를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도시와 분리되어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공원은 현대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잠시 현실을 도피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이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어딘가 자유로워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원의 규모도 엄청났다.
공원에 들어오자마자 벤치를 찾았다.
정문 앞에 있는 벤치에는 이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벤치를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10분, 20분, 30분을 걸어도 벤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긴 산책이었다.
점심밥도 챙기지 못해 체력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고 벤치를 하나 찾았다.
벤치에 앉으니 다리에 쏠려 있던 피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몸이 편해지니 30분 동안 벤치 만을 찾던 눈에 다른 모습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은 주인과 함께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피크닉 매트 위에 누워서 책을 보거나 엎드려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를 목마 태운 아빠, 뒤에서 유모차를 끌고 오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
영화에서나 보던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영화 노팅힐에서는 화려한 할리우드 배우 애나와 평범한 런던의 책방주인 윌리엄의 관계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그렸다.
그 안엔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따뜻함이 있다.
완벽함이 행복을 만들지 않는다.
내가 겪어온 행복은 어떨 땐 엉뚱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불완전함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행복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불완전하며 예측 불가능하다.
“Happiness isn’t happiness without a violin-playing goat.”
“행복이란 건, 바이올린 켜는 염소 없인 진짜 행복이 아니야.”
– 윌리엄의 친구들 식사 장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