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구글 영국지사

by Jason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혹시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어차피 볼 수 없다면.


돌부리가 발에 치인다.

가끔은 발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있다.

난 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게스트들은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부엌으로 모였다.

간단히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사온 먹을거리들을 펼쳐 놓고 맥주 캔을 따서 잔을 부딪혔다.

8시쯤 되었을 때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2층 방으로 가는 것 같더니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도 오늘 함께해도 될까요?”

게스트들은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현이 마저도 나를 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당연하죠! 어서 오세요. 맥주 드실래요? 준비해 놓을게요.”


은기 씨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장 궁금한 여행자다.

매일 가장 늦게 나가서 항상 정해진 시간에 들어오는 낯선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도 그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8시였다.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저는 딱히 어딜 다녀온다기보다 회사를 다녀서..”

은기 씨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구글에 다니는 수재였다.

실리콘벨리에서 일하다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하기를 결정하고 지사가 있는 도시에 머물면서 여행도 하고, 일도 한다 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서로 관심사가 겹친다는 걸 눈치챘을 때 은기 씨가 더 궁금해졌다.

은기 씨도 나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았다.

“혹시 내일 일정 괜찮으시면 저희 회사 놀러 오실래요?”

은기 씨가 제안했다.

“실례되는 게 아니라면 너무 좋죠!”

내일 은기 씨의 낯선 루틴에 함께 할 약속을 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날 은기 씨와 나는 약속한 시간에 만났다.

나는 어제 다 하지 못한 대화를 해야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회사로 걸어가며 은기 씨는 런던 지사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킹크로스역 근처에 있는 구글 지사는 런던 오피스 4~5개 중 가장 큰 규모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새로운 런던 지사가 지어지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예정보다 공사 일정이 미뤄져 2025년 후반기에 완성된다고 한다.

새로운 지사는 런던의 마천루인 샤드를 눕혔을 때의 가로길이 보다 길다.


“회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제공해 주긴 하는데 영국지사 밥이 제일 맛없어요. 오늘 점심식사를 회사에서 같이 먹을 계획인데 너무 실망하실까 봐 걱정이네요.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식사가 어떻게 되었든 별 상관없었다.

어제 은기 씨와 맥주를 마시면서 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더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여행하시면서 일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겠어요. “

”그렇죠.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회사 동료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자유로움 속에 절제도 필요해요. 저는 지금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고 있어요. 프로젝트를 마치는 기한까지 일을 계획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회사를 출퇴근해요. 하지만 이건 양날의 검이에요. 한번 나태해지면 끝도 없이 나태해질 수가 있거든요. 기한 내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한다거나 다른 팀보다 적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 1년에 한 번 받는 평가에 문제가 생겨요. 표면적으로 보면 자유로워 보일 수 있지만 저도 프로젝트 마감기한에 시달리는 회사원이에요. “


회사에선 열심히 일한 만큼 확실한 보상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2~3년 만에 승진을 3~4번씩 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자신의 동기가 선임자가 되어 프로젝트를 이끄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구글에 도착했다.

방문증을 발급받기 위해 은기 씨는 키오스크로 향했다.

나는 회사 로비를 둘러보았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로비 천장 위로 하늘이 보였다.




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싶었다.

그 빌어먹을 돈과 명예 때문에 허무 맹랑한 꿈을 꾸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네가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를 버려."

한참 답답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누나가 나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평범하게라도 살아보자.

회사를 다니면서 가정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랑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평범한 삶.

그런데 평범하게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몰랐다.


나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겨 다녔다.

사람이 싫어서, 일이 나와 맞지 않아서. 이유도 다양했다.

상사의 업무 지시는 귀찮은 것이라고 여겼다.

효율을 따지는 나는 회사의 관례를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때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큰 사고를 겪고 나서야 내가 답답하다고 느낀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이 이해가 되었다.

특히 회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말이나 행동에 예민한 나는, 가시 돋친 말을 견디지 못했다.

내게도 가시가 있었다.

그 날카로운 가시가 때로는 상대를 찔렀다.

그만둔 직장에서 다시 나를 찾는 일은 없었다.


매일이 지옥이었다.

어느 날 회사 선배가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며 구내식당이 아닌 회사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날도 나는 사망선고라도 받은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네가 밉지 않다. 나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네."

선배는 팀원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모든 스스로 나서서 일을 도와주고 후배들이 모르는 것을 몇 번을 물어봐도 매번 똑같은 어투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품이나 제품을 만들어. 상품이나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매달, 매주, 매일 같은 일을, 같은 퀄리티로 내놓는다는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이 필요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네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높으신 분들의 대부분은 그런 책임감과 성실함을 오랜 기간 동안 지켜낸 사람들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 당장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 같다. 작품은 특별한 걸 만드는 일이지.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일까? 특별한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주 찾아오지 않아. 그리고 그 특별함은 성실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거야. 지금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살지 못한다면 절대로 특별한 걸 얻을 수 없어. 그리고 너의 주관을 지켜서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회사 생활은 맞지 않아. 여기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선배는 따뜻하게, 그렇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 봐.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작품을 보는 눈을 갖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함을 갖기 위해 노력해. 요행을 바라지 마.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냥 얻어지는 건 없어. 나는 네가, 너의 주관이 들어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책임감을 갖고 성실해지자.


그리고 난 아직 그날 선배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작품을 보는 눈 그리고 특별함.





"여기 출입증 받아왔어요. 들어가요! 사무실 구경 시켜 드릴게요."

출입증을 건네주며 은기 씨는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내리길 기다렸다가 은기 씨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덕에 사무실 곳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 봤던 하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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