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영국지사 2
수영장의 락스향과 매점의 라면 향이 섞인 공간은 향수를 일으킨다.
누나는 수영 강습을 받았고,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누나의 수업이 끝나는 동안 매점에서 과자나 초콜릿을 사주었다.
나는 매점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수영하는 누나를 보았다.
"너도 한번 해볼래? 하고 싶어?"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그 이후로 나도 수영을 시작했다.
여름에는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스피드 스케이트를 탔다.
다른 운동도 많이 배웠다.
축구, 농구, 야구, 배드민턴, 테니스, 탁구, 스키 등 생활 체육 이외에도 여러 운동을 배웠다. (구민센터등에서 저렴하게 배웠다)
또래보다 피지컬이 월등했고 운동신경도 제법 있었다.
선생님들은 가끔 밖에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찾아가 선수로 키워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었다.
그 시절 '운동 군기'라는 게 있었다.
선후배사이의 무서운 위계가 있었고, 흔히 '빠따'를 친다는 운동선수들의 문화에 어머니는 직업인으로서의 운동선수를 반대하셨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선생님들이 어머니에게 그런 제안을 많이 했다는 걸 알았을 때 운동선수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
그만큼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도 지금은 가끔 "그때 운동을 시킬걸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하신다.
구청이나 시에서 운영하는 뮤지컬이나 전시회등도 많이 보여주셨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 어머니는 문 앞에서 항상 누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의 차는 티코였다. 아직도 그 시트와 차 안의 향기, 그리고 카세트박스가 있던 차 안에서 나오는 노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옆으로 보이는 둑길과 대학병원등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누나와 경쟁적으로 나눴다.
어머니가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판단하지만, 내가 지금 직업으로서 하고 있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하셨다.
어머니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은 어머니가 어떤 교육의 의도로 내게 제안하신 것 같진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와 누나가 좋아한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시켜주셨다.
어머니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직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을 때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데리고 미국을 여행했다.
내가 해외를 나와서 돌아다녀보니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에 어머니가 우리 손을 잡고 대륙을 여행한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겁이 나지 않았느냐고, 무슨 생각으로 어린 우리 둘을 데려갔냐고 물어보면
"겁났지. 어린애 둘이 데리고 가서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봐. 그런데 좋은 기회잖아. 어릴 때 여행을 다녀와야 그 기억도 오래가고. 평생 잊어버리지 않지."
확실히 그때의 기억은 강렬하다.
어머니의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그때 본 풍경과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은기 씨는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을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회사 안에는 헬스장, 스낵바, 수면실, 수영장, 각종 클래스를 듣는 강의실 등 없는 게 없었다.
전쟁이 나면 이곳에 1년을 있어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은기 씨는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해 주었다.
다들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회사 사무실이란 공간의 공기가 이처럼 활기가 돌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무실을 한 바퀴 돌고 식당으로 갔다.
은기 씨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정말 많았다.
음식 앞에는 셰프들이 서있고 메뉴에 대한 설명이나 맛있는 음식의 조합을 알려주었다.
뷔페식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것을 양껏 덜어 자리에 앉았다.
돌아다니다 보니 나와 같은 방문증을 걸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은기 씨 말로는 직원들의 가족들도 회사에 와서 자유롭게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다.
배낭 여행자에겐 과분한 음식들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드시라는 은기 씨 말에 2~3킬로를 찌워갈 생각을 했다.
어제 은기 씨와 나는 문화생활관한 취미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같이 있던 게스트들이 흥미를 갖는 주제가 아니어서 오랫동안 이야기 하지 못했다.
은기 씨도 아쉬웠는지 오늘 회사에 초대해 주었다.
”저는 인문학적인 여행을 하고 싶어요. 그런 여행지를 찾다 보면 그날 여행했던 곳을 회고하기도 하고, 공유하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아쉬워요. “
은기 씨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맞아요. 저도 그런 여행을 너무 좋아하는데 제 주변엔 그런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걷는 것도 좋아해서 여행지 사이사이를 걷고 싶은데 여행 와서 고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뭐가 좋다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여행도 스타일이 맞아야 하는 것 같아요. “
”그런데 혹시 은기 씨는 걱정 같은 거 있어요?”
조금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질문했다.
“걱정이라기 보단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어릴 적 은기 씨는 한국보다 러시아에 오래 살았다.
초등, 중등 교육을 러시아에서 받고 잠시 한국을 들러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으로 대학을 갔다.
그렇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서 서툰 것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리콘벨리에 있는 구글에 입사한 은기 씨는 그곳에서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한다.
대학도, 처음 다닌 회사도 실력자가 모이는 곳이었고 한국인 친구들도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친구들과 한국 친구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자신이 일하고 싶은 나라나 회사를 정해서 도전적인 꿈을 꾸는 반면에 한국친구들은 한국을 벗어나는 것 자체를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은기 씨는 외국 친구와 한국 친구의 마인드셋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교 3학년 때 어떤 공익광고를 하나 봤어요.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는데 왜 쓰레기를 줍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적어도 내가 지나가는 길은 바뀔 수 있지 않느냐고. 저는 그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나도 저렇게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지나간 자리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멋있는 생각이에요. 선한 영향력이네요.”
“실리콘벨리에 있는 대학 동기들을 모아 팟캐스트 채널을 만들었어요. 세계로 나가고 싶은 한국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어떤 일이든 정보가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영향력을 갖는 일이 쉽지 않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어떤 일도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요.”
은기 씨의 이야기를 듣던 중, 지금의 나도 은기 씨가 이야기하는 한국의 친구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유는 좀 다르겠지만.
매번 직장을 제 발로 걷어차고 나온 나는, 은기 씨의 회사, 받고 있는 대우, 어린 시절을 밀도 있게 보낸 만큼 보장되어 있는 미래가 부럽다고 생각 들지는 않았다. 꿈을 이야기하면서 빛나는 눈을 하고 있는 은기 씨가 부러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말할 때 발하는 은기 씨의 열기가 반대편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똑똑하지 않고 의도되지 않은 어머니의 교육 중 내게 큰 영향을 미쳤던 건 '순수함'이었다.
어머니는 순수한 분이셨다. 어릴 적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순간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나 지나치게 긍정적인 모습도, 항상 밝은 표정도, 감정표현을 아낌없이 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엔 ‘순수함’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필터를 거친다. 이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 지금의 여행이 생각보다 즐겁지 않은 것도, 있는 그대로를 즐기지 못하는 것도 여행 끝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여행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고 있다. 이 압박감이라는 것은 형상 없는 실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끝없는 터널 속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함이다. 순수하지 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 감정에 솔직하지 않게 된다. 현실이란 벽에 익숙한 머리는 언제나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
흘러가는 감정을 놓치지 않고 내 안에서 해석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얻는 것. 그 안에서 다시 정제된 무언가를 꺼내는 것. 그리고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
선배가 말했던 특별함.
예정에 없던 그리니치 천문대를 다녀오기로 했다.
비가 와서 천문대 주변의 공원을 오래 걷지 못했지만, 가는 길의 기차 안은 낭만적이었다.
빗속을 뚫고 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아름답다.
불과 1~2주 전에 복솔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불안에 떨던 모습과는 다르다.
인간의 적응은 무서운 것 같다.
순수함은 세상을 온 감각을 통해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이런 감정은 머리에 어질러 있던 생각들을 긁어모아 뭔가를 하고 싶게 만든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무언가 자라기 적당한 온도다.
세상을 순수하게 바라보고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함을 찾고 싶다.
그리고 은기 씨처럼 꿈을 꿔야겠다.
이제는 내 안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숨겨두었던 아이를 지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