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차이
이성에 대해 깊숙이 알 수 있는 수단은 연애 말곤 없다. 동성연애엔 해당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새로운 걸 알아가기보다 더 깊은 연대감이 존재하지 않을까. 다른 건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 나만의 생각일 수 있다고 괜스레 주눅 들기도 하다. 근데 이건 확실하다. 여성학, 남성학 논문을 읽어보거나 그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전공한다면... 글쎄. 그래도 논문엔 없는 생활밀접형 실질적인 지식들을 큰 노력 없이도 알 수 있달까. 그게 뭐가 도움이 되느냐 묻는다면 사랑과 평화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지만 말이다. 편의상 ‘서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라고 하자.
나의 경험상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잘 모른다. 종족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동물을 바라볼 때도 수컷과 암컷의 외형적인 다른 특징 말고는 잘 모르지 않나. 하물며 인간에게도 가슴과 성기라는 다른 외형적 특징이 있지만 그것들을 가리는 옷이란 것도 있고 패션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니 더더욱 구분이 힘들다. 구분할 필요가 없어진 사회에서 그럼에도 다를 수밖에 없는 신체적, 사회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선 모든 면에서 다른 성별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게 꽤나 이해, 배려, 존중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 미술관에 가서 벽면에 붙어있는 학예사의 견해와 연구 텍스트를 읽고 멀찌감치서 작품만 뚫어져라 바라봐야 하는 전시보다, 직접 만져보고 그려보고 듣는 체험형 전시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것과 같다. 이렇게 비유하니 조금 전공병같지만.
성교육 시간에 남녀가 따로 듣는 것 자체가 참.. 그렇다. 그것부터가 서로 내 알 바 아니란 걸 알려주는 꼴이다. 누가 서로의 성기가 다르게 생겼는지를 모를까. 성교육시간에 배웠어야 할 것을 다 커서 연애하면서 손 더듬어가며 알게 되는 것이 회의감이 들긴 하는데 뭐, 일단 그렇다. 사실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앞서 말했듯 사랑과 평화에 도움이 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연애에 있어서 ‘덤’이 필요하긴 하다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연애가 길어질수록 로맨스보다도 감정의 교류가 소중해지고 스킨십보다 단 한 마디 말이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배려 담긴 단 한마디를 위해선 상대를 더 깊숙이 알 수 있는 수단인 ‘덤’이 필요했다.
가벼운 무지의 일례로 나는 첫 소설 습작에 ‘몽정’을 소재로 했었다. 소설 속 주인공 진혁은 야한 꿈을 자주 꾼다. 잠에서 깬 진혁은 자주 꾸는 그 꿈을 꽤 즐겼다. 그런데 자신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면서 자주 꾸던 꿈속에서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한 채, 현실과도 같아진 공간에서 관계만을 가졌었던 꿈속 여성과 단 둘이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단지 몽정을 ‘야한 꿈’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습작을 해에게 보여주었을 때 조언을 해주어 알았다. 그 소설 속에서 ‘몽정’이란 단어를 쓰는 게 매우 어색하다는 것을.
반대로 해가 여성의 몸과 호르몬으로 인한 증상들을 잘 알게 된 것은 나 때문이었다. 나는 난소종양과 생리 전 불쾌장애로 인해 산부인과에 밥 먹듯 들락거렸다. 호르몬 쪽 문제이다 보니 PMS도 아주 심한 편이고 건강 변화에 예민하다. 단골 산부인과와 선호하는 의사분이 있는 나는 여성질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거부감이 없었는데, 소극적인 우리나라 사회에서 같은 여성끼리도 이런 대화를 꺼려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아프고 나서 알았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대뜸 ‘난 여자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월경에 대해 알아보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이니 알고 싶고, 배려하고 싶으니 알아가려 하는 것이지.
나는 남. 녀 관계가 남. 남 혹은 여. 여 관계와 다를 게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서로의 육체가 다른 이상 같을 수가 없더라. 정신적으로 비슷할 순 있어도 내재된 거부감 같은 것도 있고. 엄마와 딸 사이에 서로의 치마를 들추면서 “오, 팬티 재질 괜찮다.” 따위의 대화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과 달리 아들은 그것이 놀랍기만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