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미술용 연필을 깎는 법을 보았습니다. 그게 어찌나 신기하고 마음이 두근거리던지요. 능숙하게 선을 쭉쭉 긋던 영상보다, 현란하게 디지털 단축키를 누르며 그림을 그려대던 영상보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림이 좋았지만 재수 없게도 공부에 더 재능이 투철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의무적인 공부를 끝내고 어른이 된 저는 허상의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누가 그려놓은 그림을 연구한다던지 작가들의 서사가 쓰인 책을 읽기보다 저는 직접 마음속 세계를 세상에 펼쳐내고 싶었습니다. 청개구리처럼 말이죠. 그래서 창작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두근거리는 일을 하자. 근데 하고 싶었던 일에서조차 청개구리 기질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려 할 때 두근거림은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었고, 글을 쓰기 위한 새하얀 화면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화면을 꺼버렸습니다. 이건 그 누구도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연필 깎는 법’을 보고 다시 두근거리다니요. 기다랗고 뾰족하게 깎인 화면 속 연필은 오빠의 연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내가 그리도 선망했던 미술교육을 받았던 나의 오빠는 그 기다랗고 희한한 모습의 연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한심하게 게임만 하는 오빠가 저런.. 저런 전문가(?) 같은 연필을 깎다니! 분명 오빠의 엉터리 그림을 대대적으로 엎어 엄청난 소묘 작품으로 수정해준다던 선생님이 깎아줬을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너무너무 부러웠습니다. 몇 번이고 멀쩡한 연필로 따라 해 보려 한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망해서 숨겨놨거든요.
미술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초록색 이슬병을 그린답시고 멀찌감치서 눈을 찡끗대며 연필로 각도를 재던 동기를 보곤 꼴값 떤다 생각했습니다. 미술학원 다녀본 적 있어? 역시. 학원에서 알려주는구나. 한이 맺힌 대한민국의 성인은 끝끝내 고집을 부려 화실에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선 긋는 법도, 연필 각도 눈 찡긋도 하지 않았어요. 그곳엔 위이이잉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전동 연필깎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과연 연필 깎는 법도 진화한 거구나! 기다란 연필 따위 손으로 스각스각 깎아야 하고 귀찮기만 하지. 그래도 혹시 몰라 제 책상엔 쓰다 버린 오빠의 기다란 쇼묘 연필을 꽂아두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종이에 흑연이 묻히지도 않는, 나무는 물러버린 그 연필이 혹시나 쓰일까 싶어서요.
그런데 왜 미술 하는 사람들은 귀찮게 방망이 깍듯이 연필을 손으로 한 땀 한 땀 깎아대는 걸까요? 이 의문은 기어코 해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티슈를 책상에 깔고 비싼 새 연필을 손에 들었습니다. 장비 욕심은 있어서 연필계의 명품이라는 블랙 윙(!)밖에 없었거든요. 그래.. 명품 연필이라도 3000원 정도야. 괜찮아.. 내 3000원.. 돌이킬 수도 없이 칼이 나무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손은 화면에서 보았던 대로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돌돌 돌리면서 나름 예쁘게. 아니, 재밌잖아? 순식간에, 생각보다 귀찮지 않게 내게도 내가 손수 깎은 미술용 연필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별생각 없이 개시한다는 생각으로 아무 종이에 슥슥 선을 그어보았는데,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선 긋는 느낌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짧게 깎인 연필과는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불안하다 생각했던 기다랗게 드러난 흑연은 그 역시 기다란 나무 부분이 지지해주는 느낌이 퍽 생소하고, 별 것 아니고, 두근거렸습니다. 연필에 힘을 주어 쥐지 않아도 연필이 스윽- 스윽- 하고 걸림 없이 선이 길게 그어졌습니다. 연필만으로 선이 달라지다니. 역시 장비는 중요하다. 꼴값이라 생각 말고, 부럽다, 신기하다 생각만 하지 말고 물어라도 볼걸. 직접 해볼걸. 부끄러워말걸. 이제 꼴 보기 싫은 애물단지 오빠의 연필을 버려야지. 그 자리에 네가 들어갈 거야, 기다랗게 미술용으로 깎인 블랙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