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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15. 2021

나의 새로운 동네

초록 지붕의 앤


나는 나의 새로운 동네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8살이던 해 현충일, 나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다. 다른 건 다 기억이 안 나도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던 놀이터와 처음 살아보는 아파트 단지를 두리번거리며 느꼈던 낯섦이 난 왠지 모르게 좋았다.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20년이 넘도록 살았으니 내게는 그곳이 고향이었다.


나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고향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마음을 외면한 채 나는 따뜻한 봄에 정든 고향을 훌쩍 떠났다.


내가 고향을 떠나야 했던 건 남편의 직업 때문이었다. 남편은 하늘을 나는 군인이다. 남편이 영내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군부대 내 관사로 들어왔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알고 있었나 싶었다. 나는 뒤늦게야 내 마음에 쏟아지는 이별의 감정을 충분히 안아줘야만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로 3주 정도의 기간은 '집'이란 공간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스위치의 위치며 이 집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편의 격리 근무 덕분에 점심에도 남편을 잠깐 볼 수 있었고 더불어 점심, 저녁 식사 준비로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분주한 날들도 잠시, 남편의 근무 복귀를 시작으로 나는 '독립'이란 단어를 마주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늘 붙어살았던 나였기 때문에 이제야 정말 홀로 선 기분이 들었다. 늘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2인 3각 경기에서 마라톤으로 종목이 바뀐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독립이란 단어가 원래 이런 느낌이었을까. 홀로 있는 시간이 급작스럽게 늘어나자 나는 아주아주 오랜만에 '고립감'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여봉봉, 내가 요즘 집에서 고립감을 느껴. 부대라는 장소도 한몫하고 말이야."

"응, 알지. 부대에서의 고립감, 나도 느껴봤는 걸."


내가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까 봐 남편은 심히 나를 공감해주며 위로했다. 그렇지만 이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겠어."





부대에서 번화가로 나가려면 광역버스를 타거나 40분 이상을 걸어야만 한다. 어느 날은 배차 시간이 너무나 긴 버스를 기다리기가 지겨워 한 정거장을 걸었다. 10분도 되지 않는 그 거리를 걸으며 온통 낯선 풍경에 내 마음이 잔뜩 우울해지기도 했다.


어느 하루는 그날이 지나면 만료돼버릴 음료 쿠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 쿠폰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카페의 위치를 찾아보니 걸어서 대략 45분 거리가 나왔다.


'45분이라···, 이참에 걸어볼까?'


물론 배차간격이 17분 정도 되는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난 걷기를 선택했다. 커피 한 잔을 위해 걷는다기 보다는, 집을 나설 구실이 있으니 굳이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누벼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껍질이 딱 달라붙은 마늘들을 물에 담가 두고 나온 아낙네의 산책이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 흥겹게 걸었다. 앞만 보지 않고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며 걷기도 했다.


'이곳이 나의 새로운 동네란 말이지.'


부대 근처라 눈앞에 보이는 건 대략 널따란 도로와 나무들이었지만, 눈에 하나하나 담아보았다. 마구마구 걷다가 멈춰 서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역시, 카메라가 다 담아내지는 못하는 군.'


푸릇푸릇 나무며 풀들이 많아서 좋았다. 몇몇 보이는 화원들을 지나가면서 다음에 남편과 함께 들러서 꽃이나 작은 식물들을 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칠 때쯤 되니 새로운 단지가 보였고, 나는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료 쿠폰으로 아이스 라테를 시켰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잠시 멍하니 앉아 쉬었다. 지나가는 버스도 구경하고 주변에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둘러보기도 했다. 15분 남짓 앉아 있었을까. 라테를 다 마시고 난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저녁 식사 준비 때 쓸 순두부도 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다음번에는 지도를 찾아보지 않고도 올 수 있겠다고 스스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래도 혼자 걷는 것보다 남편과 둘이 걸으면 더 좋겠지.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보이는 나무들이,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들이 너무 좋았다. 어쩌면 내가 이 길을 꽤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흐린 하늘이었는데,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해가 잠깐 얼굴을 비췄다. 막바지에 이른 나의 산책길에 배웅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 멀리 초록 지붕이 보였다.


'집에 다 왔다.'


부대 정문의 초록 지붕이 보이자 '초록 지붕의 앤(Anne of Green Gables, 빨간 머리 앤의 영어 원제)'이 떠올랐다. 그리고 뭐랄까, 매슈 아저씨를 따라 에이번리 마을에 다다른 빨간 머리 앤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초록 지붕의 앤 이라 하지 뭐."


나의 새로운 동네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갑자기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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