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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색하는 고양이 Jun 29. 2024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접한 건 내 기억이 닿지 않을 고등학생 시절로 기억한다. 

요즘도 과세특이라는 말을 쓰는진 모르겠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그 과세특에 몇 줄이라도 채우려고 봤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도전해 볼까 했으나 부끄럽게도 그때 당시 이 책을 이해할 배경지식이 부족했던 터라 몇 장 읽지도 않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지식과 생각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한번 이 책에 도전해 보게 되었다.




삶을 사유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지?”라는 질문을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한 번쯤은 듣거나 물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단한 질문이나 쉽게 답하기란 어려운 질문이지만,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그 해답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     


유전자의 이기심과 이타심

 우리는 수백만 년 동안 살아왔고 진화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러한 유전자에 어떠한 특징이 있음을 알았고 이러한 유전자 중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위해 종을 희생시키는 ‘비정한 이기주의’이긴 하지만, 개체 수준에 따라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임으로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특별한 유전자도 있다고 주장했다.

 펭귄은 바다표범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기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 펭귄 무리 중 한 마리가 물에 뛰어들면 펭귄은 물 안에 바다표범의 유무를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누구도 뛰어들려고 하지 않고 무리 중 하나를 떠밀어 버리려는 행동을 보인다. 이건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주의적 행동이다. 

그럼 이타적인 행동은 어떨까? 꿀벌은 독침을 쏘면 침과 함께 내장이 함께 빠져나와 죽게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의 종족을 보호하려는 이타적인 행동이나 관점을 바꾸면 자신을 희생하여 종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신의 욕구를 위한 이기적인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생존기계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생존 기계이며,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라고 정의 내려진다. 즉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운반하기 위한 기계에 불구하다’라는 것이다. 펭귄이 자신의 동료를 물 안에 밀어 넣는 것도 한 개체의 희생으로 다수의 유전자를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본능이고, 꿀벌이 자신을 희생하여 다수를 지키는 것도 이타적인 행동이긴 하나, 유전학적인 시각으로 봤을 땐 자신을 희생하여 유전자의 대를 잇게 하려는 이기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이기주의

 우리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펭귄처럼 서로 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려는 개인적인 이기심도 보여주지만, 꿀벌같이 이기적인 이타심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문구가 바로 초기 자본주의를 주장한 애덤 스미스(1623~ 1790)가 지필 한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닌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라는 《국부론》의 한 문구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맛있는 식사와 좋은 경험 및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같은 낭만적인 생각이 아닌, 그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인 것이다. 세상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10의 자원 중에서 A가 7을 얻으면 B가 3을 얻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다. 

다만 여기서 인간의 종의 유지를 위한 이기심은 세상의 자원을 10에서 20, 20에서 40으로 늘리는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으로 바꿔놓았다.


우리는 생존기계인가? 

이렇듯 인간의 이기심도 결국에는 우리 인간을 종속시키려는 하나의 비정한 이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 말하는 생명체의 본질은 유전자를 보존하는 생존 기계로서의 성질을 지니며 삶의 이유는 유전자를 운반하기 위한 것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한다. 그럼 우리 인간의 삶도 정말 아무런 이유와 가치가 없이 그저 유전자를 옮기는 기계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밈은 연쇄적이다.

 저자의 주장에서 인간은 유전자 말고도 이라는 자기 복제 수단을 지니고 있으며, 이란 인간의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로 정의 내렸다.

예를 들어 한 선생님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선생님은 봉사활동의 일종으로 A라는 제자를 가르쳤고 A는 이 가르침으로 의사가 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선 B라는 아이를 치료하고 B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C라는 아이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준다. 또한 세계 2차 대전 때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 뒤편엔 “내 바람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소망이 적혀있었고, 안네는 안타깝게도 17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안네가 쓴 일기장은 영원히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타인에게 삶의 희망과 좋은 메시지를 준다.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밈이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흔적을 세상에 묻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은 유전자처럼 연쇄적인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자

 니체의 명언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사랑하자.”라는 문구를 좋아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무의미하며 고통의 연속이다. 기쁜 일도 있지만, 언제나 그에 수반하는 고통도 동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우린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으로의 레이스를 하고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취업을 위해 자기 계발을 하고 취업을 한 뒤 회사에서 퇴직 전까지 끊임없이 노동을 하더라도 결국엔 죽음으로서 끝을 맺음으로 모든 게 다 부질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삶은 유한하기에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친구들과 즐기던 축구, 가볍게 즐기던 게임 등 모든 것들이 행복했고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면 그 행동들은 단언컨대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우린 짧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타인을 위해 살 수도 있고,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세상에 내 삶의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 또한 가치 있고 명예로운 삶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은 유의미했던 한 순간의 찰나다.

따라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무의미하거나 삶이 허무하더라도 그곳에서 나만의 가치를 찾는다면 나에게만큼은 소중했던 삶의 한 찬란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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