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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삭 Aug 20. 2024

당신의 슬픔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10.29 이태원 참사> 그 후.

자정이 멀지 않은 주말 밤이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계속 '웅웅' 거리고 울렸다. 언론사별 속보 알람이 연속으로 들어왔다. '이태원에서 사고가 났다고?' TV를 틀고 뉴스화면에 나오는 빨간 속보 자막에 집중했다.


핼로윈을 앞두고 시끌벅적할 그곳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단다.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는 자막이 연이어 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집계된 사상자가 0 단위가 아니다. 00 단위.. 000 단위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었다. 카톡이고 텔레그램이고 메신저 방마다 난리가 났다.


SNS에 '이태원'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자 사고 현장 영상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좁은 골목길에 수 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꼼짝없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밑에 깔린 누군가가 정신을 잃어가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다른 영상엔 거리며 도로며 누워있는 사람들과 이들에 달라붙어 급히 심폐소생술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새벽 내내 믿기지 않는 상황을 지켜보며 밤을 지새웠다. 지난 몇 년 나 역시 이태원에서 핼로윈 파티를 즐겼던 경험이 있는데, 이런 사고가 벌어진다는 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아니, 그 누구도 상상해 본 적 없을 거다.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충격적인 사고. 온 세상이 이태원에서 벌어진 이 사고에 주목했다. 매체와 언론을 통해서는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이들의 모습과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열하는 부모, 친구를 잃고 울며 괴로워하는 이들의 모습이 전해졌다. 골목을 찾아 추모하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세월호 참사 당시 겪었던 것처럼, 나라 전체가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는 것 같았다.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고, 모두가 함께 울었다. 누군가 '놀다 죽은 애들이 왜 불쌍하다 난리냐.' 했을 땐 '인간 맞냐.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분노하기도 했다.


사망 159명 (사고 이후, 한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부상 196명.

사람들은 이 사고를 '이태원 참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이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치권이며 관련 행정기관이며 '누구 탓이냐'를 따지는 책임 공방이 본격적으로 오가기 시작했다. '네 탓이다, 아니다' 하는 사이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겼다. 엉망이었다.


어느 날, 한 뉴스에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가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 배우였고 대중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언론에 관심이 더 집중된 희생자 L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을 잃은 슬픔과 유가족들이 겪고 있는 답답한 심경 그리고 울분을 토해냈다. 자식 잃은 슬픔 추스리기도 전에 세상은 더 큰 멍자국을 내고 있었다.


이 시기 유가족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하여 한 데 모이고 있었다. 우리 팀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들이 모일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던 한 분이 연결됐다. '많이 답답하신 상황 같은데, 혹시 저희를 통해 말씀을 전할 분이 계실지. 모든 것을 말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마련하겠다.' 피디 요청에 자신이 한 번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했고,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줘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번호 하나를 건네받았다. (누구에게 어떻게 이 번호를 받았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L의 아버지 연락처였다.  '아... 직접 연락드려야 하나.' 일하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지만, 매번 심장이 덜컥거린다. 누가 내 아픔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아파 미치겠는데, 내가 타인의 아픔에 직접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 정말 쉽지가 않다.

 

한숨 돌리고 용기 내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몇 번 더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 전화했다는 자체가, 내 번호가 부재중에 남겨져 있을 자체가 죄스러웠다. '마지막이다' 하고 메시지를 한 통 남겼다. '우리 모두가 함께 슬퍼하고 있다. (...) 혹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돕고 싶다. (...) 목소리를 내시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 주셔라. 기다리겠다.' 답은 없었다.


몇 시간 뒤, 피디가 인터뷰를 요청한 쪽에서 답이 왔다. 희생자 S의 아버지가 인터뷰에 응하시겠다는 거다. 피디가 급하게 인터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내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순간 손이 덜덜 떨렸다. L의 아버지였다.


사람 없는 조용한 복도 구석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저 00이 아빠입니다." "네, 아버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가 지금 우리 00 이를 보러 왔는데요..." 전화기 너머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엉엉 목메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고 같이 울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작가님. S아버지가 인터뷰하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제가 안 했거든요.. 괜찮다면 저도 같이 한 마디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두 아버지와 인터뷰를 가지게 됐다. 인터뷰 녹음 편집을 마친 피디가 부조실에 올라와 내 뒤에 주저앉아 울며 말했다. "아.. 작가님.. 정말 너무.. 슬퍼요."


그날 이후, 유가족들은 언론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면 인터뷰, 라디오, TV 인터뷰를 가리지 않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왜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지, 책임이 누구에 있으며, 어디에서부터 잘못 됐는지.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거리며 국회며 가리지 않고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사 그날로부터 하루하루 더 멀어질수록 '그만해라. 적당히 해라. 언제까지 할 거냐'는 여론이 커졌고, 입에 담기도 힘든 악성댓글이 쏟아지며 이들을 매섭게 할퀴었다.

 

L의 부모가 절규하는 모습은 뉴스를 통해 자주 노출됐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안색은 안 좋아졌고, 분통 터지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어 보였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그들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끔 시청 광장 추모 공간 앞을 지나게 될 땐, 숨이 '턱' 막히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인지 영정 사진 쪽을 바라보는 것이 편치 않아 똑바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참사 1주기가 됐을 때, 생존자 중 한 분과 인터뷰를 가진 적 있다. 그녀는 '유족 분들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앵커 질문에 "아마도 외로움을 넘어서 고독하고 쓸쓸하실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렇지. 너무나도 길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싸움이었다. 나는 감히 그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겠지.


그래서 가끔 생각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은 함께 기억하고, 잊지 않고,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 알리는 것인데.. 그 몫을 제대로 했는지를. 고독과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주었는지를.


지난 5월 2일, 참사 발생 551일 만에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인터뷰에서 유가족 한 분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말한 것을 봤다. 그들은 또 어떤 다음을 위해 나아갈까.


가슴에 쏘아대는 수천수만발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버텼다. 누군가가 지쳤을 땐, 다른 이가 나섰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버티고 나아갔다. 나는 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본 목격자 중 한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그저 슬픔에서만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5월에 쓴 글이었는데, 뒤늦게나마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부족하고 작은 마음일테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10. 29 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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