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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삭 Aug 20. 2024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흰나비가 되어 하늘로 훨훨 날아간 외할머니를 추억하며

'할머니 돌아가셨어. 나는 이따 내려갈 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 한참 바쁜 시간에 엄마의 문자가 툭 날아들어왔다. 점심도 거르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일하던 때였다. 오늘 내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이미 들었지만, 하루 한 푼이 급하고 이도저도 할 수 없던 그 때 내 마음은, 이 얘기를 들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요." 조심스럽게 ㅎ피디님에게 말을 전했더니

"네? 빨리 가야하는 거 아니예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곧장 팀장에게 보고했는데, 팀장은 난색을 표했다.

"에고,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겼다. 온갖 잡무에 가까운 내 일을 당장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 당장 오늘 뒷치닥거리할 한사람 빠지면 방송에 지장이 있다는 것.


"그럼 발인은 참석 할 수 있게, 발인 전날 방송 마치고 바로 내려갈 수 있게 해주세요. 하루 휴가 내고 싶어요."


하루 이틀은 실감 나지 않고 오히려 덤덤했다. "내가 이제 알아서 할께. 빨리 차 타러가." ㅈ선배와 ㅎ피디님에 등 떠밀려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출발 1,2분 남겨놓고 겨우 막차에 올라타 한숨을 돌렸다.

창 밖이 어둑해질수록 유리창에 내 얼굴은 뚜렷하게 반사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보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터졌다.


큰 아들 내외와 사이가 퍽 안 좋았던 할머니는 시집와 반 평생 넘게 살던 집을 나와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그중 자식들 가운데에서 형편이 제일 나빴던 넷째 딸네 집. 우리 집에 있는 걸 가장 좋아했다. “손주들 중에선 느그들이 제일 예뻐.” 우리 남매들은 어릴 때부터 많이 돌보기도 했고, 살도 잘 부벼대고 정도 많다는 거다. 손주 셋도 할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 좋았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집 안에 할머니는 우리 집 복덩이이자 막둥이 역할을 했다. "아이고~ 우리집 막둥이~" 하면서 삐쩍 마른 엉덩이를 톡톡하고 두들기면 "에잇! 내가 왜 막둥이여!" 하면서 절반이 뽑혀 없는 치아를 보이며 수줍게 웃는데, 그 모습은 어린 아이 같이 귀여웠다.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대체 어느 동네에서 시작된 노래인지 모르겠지만, 빠진 이 사이로 바람소리가 새면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웃을 일 하나 없던 집에 할머니 때문에 웃음소리가 가득해지는 날이 참 많았다.


우리 가족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방을 수십 년간 전전했다. 어떤 집에선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땅굴 내려간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에휴. 제발 땅 위로 좀 올라가면 쓰것다.“


뉴타운으로 재개발이 되기 전, 동네는 붉은 벽돌의 다세대 주택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이 골목 저 골목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길. 탁 트인 시골에서 농사짓고 텃밭 키우며 살았던 이에겐 전깃줄 가득한 하늘과 이 비좁은 골목길들이 미로 같았을 거다. 하루는 답답했는지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비슷한 풍경에 길을 잃어버리고만 할머니를 누군가가 발견해 경찰서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다가 전화를 받고 놀라 뛰쳐나온 기억이 난다.


시골 인심과 달리 팍팍하고 차가운 서울 동네에선 말동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놀이터까지 용기 내어 가봤는데, 옆에 조용히 앉아있어도 할매들은 말 한마디를 안 걸고 쉽게 끼워주지 않았단다.


그 후로 할머니는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어둔 채, 앞에 앉아 벽으로 앞이 막혀 보이지 않는데도, 문 앞에 들어오는 햇볕을 온 몸으로 받고서는 앉아있는 것을 즐겼다.

"갈 데 없어."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 같다. 학교 다니랴 일하랴 집안에 붙어있을 수도 없는 가족들이 ‘언제 오나’ 하며 하염없이 앉아 기다리는 것 밖에.


그런 시간들은 마음도 몸도 병들게 한 걸까.


할머니는 원래 자주 ‘아프다 아프다.’ 버릇처럼 말했다. 이번에도 또 그런가보다 싶었다. 그러던 사이에 할머니 목에서 몹쓸 혹이 자라고 있었다. 혹의 크기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졌고, 심각성을 인지했을 때 의사는 ‘이제와 수술은 소용없다, 노인이라 진행이 더딜 수 있으니 치료받으며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말했다. 이런 이유로 할머니는 좀 더 형편이 괜찮은 이모네 집으로 옮겨가 지내다 고향에 있는 한 요양병원으로 보내졌다.


몇 달간의 시간이 흐른 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요양병원에 찾아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할머니는 모르핀을 맞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원래 말랐던 몸은 아예 뼈밖에 안 남았는데 목 옆에 더 커진 혹을 달고 있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


고통스러워서 정신도 못 차리고 신음하는 걸 울며 지켜보다가 “할매, 혜쟁이 왔다. 혜쟁이. 혜쟁이 왔어.” 라고 귓속말을 했다. 아무리 아파도 나만큼은 분명 알아볼 것 같았다.

 

“너냐.. 너왔냐.. 혜쟁이냐.” 할머니가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병실 옆자리 할머니들에게 나를 자랑하며 소개했다. “얘가 내 손주딸이오. 손주딸. 우리 손주딸 왔쏘.” 무슨 기력이 났는지 옆 병실 할머니한테도 찾아가 나를 자랑했다. “얘가 내 손주딸.” 옆에서 지켜보던 큰 이모도 신기해했다. "오늘은 어째 저런데" 그때만큼은 할머니가 괜찮아보였다. 버텨줄 같았다.


서울 올라가야하는 막차 시간이 되어 나서는 나에게 할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꼭 또 오니라. 또 오니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집에 무슨 일이 있는 대부분의 시간마다 할머니는 우리들을 챙기러 왔고 사랑이 고팠던 우리를 품어줬었다. 작고 마른 몸으로도 한 껏. 시골 할머니의 투박하고 서툰 모든 것에는 항상 사랑이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해왔지만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공백은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채워지지가 않는다.


요즘도 가끔 자줏빛 꽃문양이 박힌 검정색 벨벳 소재의 옷을 입고 지하방 문 앞에 앉아서 작게 들어오는 햇빛을 받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햇살 좋은 날에는 북한산자락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베란다 창가에 일부러 할머니 사진을 올려둔다.


동사무소인지 복지관인지에서 찍어준, 앞니 절반이 포옥 빠져서 수줍게 웃는 사진.

이렇게라도 하면 그 시절 갑갑한 마음이 시원하게 뻥 뚫어줄까 생각하면서, 지금이라도 편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맨날 '돌아가고 싶다' 노래 부르던 고향에 있는 한 수목장에 할머니를 모셨습니다.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러 봄기운이 따뜻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는데요.

전날까진 쌀쌀했는데, 그 날은 날이 아주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옆 자리에 모실 때 근처에서 흰나비가 날아다녔어요.

그걸 보고 저는 할머니 같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너무나도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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