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만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했던 만화는 ‘빨강 머리 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스토리 인지도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만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주인공은 새빨간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땋고 나와서는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사실 만화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만화 주제가이다. TV에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노래는 지금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 주인공은 보통 예쁘게 묘사되기 마련인데 예쁘지는 않지만 이라니, 뭔가 조금은 가혹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TV 속에서 나오는 그 녀석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는 만화를 보면 꼭 주인공보다도 주인공 옆에 있는, 예쁘장하지만은 않은, 주연보다는 조연 같은 캐릭터를 좋아했다. 예를 들어 웨딩피치라는 만화에서는 피치, 릴리, 데이지 이렇게 3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중에 분홍색 머리인 녀석이 피치인데 만화 속에서 3명이 등장할 때면 꼭 피치를 중심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주로 피치를 좋아했지만, 나는 피치 옆에 있는 릴리와 데이지가 소외받는 것 같아서 피치보다는 다른 캐릭터를 더 좋아했었다.
무튼 빨강 머리 앤도 그런 의미에서 더 재미있게 봤었던 것 같다. 만화 속에서 주인공인 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쾌활하며 엉뚱한 구석도 있는 그 녀석은 어린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캐릭터가 확실한 앤처럼 나도 밝고 활발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앤의 새빨간 머리와 주근깨는 내가 따라 하고 싶은 이상향이 되어버렸다. 한 번은 엄마에게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고 싶다고 조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잔소리뿐이었다. 주인공을 따라 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방법은 있었다. 빨간 머리는 못했지만 주근깨는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잡지 속에 서양 사람들은 마르고 하얀 얼굴에 귀여운 주근깨가 가득했다. 나도 그런 소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내 얼굴에도 주근깨가 생긴다면 빨강 머리 앤처럼 귀여운 소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근깨를 만들기로 했는데, 어린 내가 생각했던 방법은 햇빛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밖에 외출할 때마다 모자 같은 것은 절대로 쓰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 햇볕이 강하게 내리쬘 때 보통의 아이들은 모자를 쓰거나 그늘로 들어가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격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주근깨가 생기기를 바라면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결국 나는 얼굴에 무수한 주근깨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근깨가 생겼지만 빨강 머리도 아니고 빼빼 마르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게 퍽이나 좋았다. 만약에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즐겁게 만든 주근깨는, 나이가 들어 기미가 되었고 더 이상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상태가 되자 거금을 들여 피부과를 들락 거렸으니 제발 정신 차리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 만화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 노력한 나의 결과가 조금은 허무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 내가 만화를 보며 부러웠던 앤의 당찬 성격은, 성인이 된 지금도 닮고 싶은 부분 중에 하나이다. “저는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될 거예요”라고 웃으며 말하던 만화 속 빨강 머리 앤이 지금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