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하는 너에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

by 순록


과거를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어느 시인의 시에서도 그랬다.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에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中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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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길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더욱 괴롭다.

없애버리고 싶은, 없어졌으면 좋겠는 그런 일들


얼마 전 술을 마셨다.

원래 술을 좋아 하지만 이제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한동안 술 먹는 것을 자제했었다.

오래간만에 친한 친구랑 술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기억이 끊겨 버렸다.

아마 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술자리에서 친구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었다.

오랫동안 간직했었던 그 말, 같은 마음이었다.

모두 내가 잘되기를 바랐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더라.

사랑은 잘되기만 하지 않더라.

동화에 나오는 엔딩 대사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라는건 현실에는 없더라.

적어도 내 인생에는 아직까지는 없더라.

그래서였겠지 친구가 그런 말을 한 것도

미안하다 했다.

그때는 너무 미안했었다고 그저 친구인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모진 말들을 했던 거라고

이해한다. 그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친구의 마음을

나였대도 그렇게 말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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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슬픈 건 이제는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의 상처가, 기억들이 잊혀 기억을 더듬어야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처는 오래 오래 남아서 그 상처 덕분에 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생각 자체가 바뀌었지, 겁을 먹어버렸지

한쪽 다리를 다쳤으니 다시는 이쪽 발로는 걸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버리게 된 것이다.


그게 참 슬프다.


그럼에도 나는 걸어가야 한다.

내게 주어진 길을 또다시 걸어가야겠지


술을 취해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내가 여전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냐고, 사랑의 온도가 같냐고 물었다.

내 사랑의 온도는 펄펄 끓고 있는데 당신의 온도는 이미 식어버린 그저 미지근한 상태가 아니냐고

그는 화를 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술을 먹었냐고 물었다.

술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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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너무 가엾다.

지나간 사랑이 아직도 날 괴롭히는 게 가엾고

지나간 사람들이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 게 억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사랑은 여전히 불안한 게 너무 가엾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인 걸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내가 문제인 걸까, 당신이 문제인 걸까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될까

당신의 모든 환경과 가치관과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모든 것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그 한가지의 이유로 모두 참아낼 수 있을까


우리의 사랑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