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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Jun 09. 2023

그 많던 고래는 어디로 갔을까

「모비딕」ㅣ 허먼 멜빌ㅣ 열린 책들 


 망각의 동물에게 음식의 쓸모는 허기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이다. 시각이 닻을 올리고 후각이 노를 젓는 불현듯 한 기억의 항해. 마침내 미각의 작살이 내리 꽂히면 나는 다시 그곳에 있다. 며칠 전, 직원식당 메뉴로 나온  쌀국수의 뻣뻣한 면발에서 으스러질 만큼 부드럽고 기름지던 그곳의 맛을 떠올렸다. '라임과 절인 마늘도 주세요.' 근육이 외치는 몇 안 되는 언어까지 뱉어보니 무심히 잊고 지낸 얼굴들이 자욱하다. 돌이켜보면, 베트남 주재원의 2년은 내 생애 가장 강렬했던 포경선이었고 그 너머로 바라본 바다엔 무모하게 아름다운 고래들이 넘실댔다. 삶의 무대를 선택할 자유, 그것을 증명할 한 권의 책, 누군가에게만 활짝 피고 싶던 마음까지도. 이 모든 건 내가 두고 온 그 바다에, 여전히 반짝이는 물기둥으로 숨 쉬고 있다.  


 육지의 동물이 바다로 간다는 건 다시 어린 짐승이 되겠다는 것. 300분의 1로 시작한 초보 노잡이 이슈마엘은 경이로운 호기심으로 고래와 포경, 포경선이란 사회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식하듯 관찰한다. 그의 수집광적인 시선은 심해에 가까워질수록 현상의 기저에 닿을 만큼 예리해진다. 고래의 숨통을 옭아맨 밧줄에서 제 목에 올가미를 걸고 태어나는 인간을 발견하고, 고래에게 진격하는 작살잡이와 허리춤의 줄로 하나 되는 순간,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타인과 샴쌍둥이가 되어버리는 운명을 깨닫는다. 포경선이 낳은 철학자가 난파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건 가장 작은 자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당부일까. 


 한편 90분의 1이 가능한 이들에게 바다는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 또 다른 고향이다. 십자가가 박힌 육지에서 식인종과 인디언, 검둥이 야만인으로 불리는 섬이 되어버린 자들이 포경선의 본질을 구현하는 작살잡이로, 퀴퀘크와 타슈테고와 다구의 이름으로, 평선원들의 우두머리에 등극한다. 길들여지지 않아 비난받던 야생은 거대한 자연을 담대하게 마주하고 위선적인 동료들을 지켜낸다. 영웅이 되어서도 작살잡이는 대부분 미국 태생인 간부 선원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믿음의 덧없음을 여실히 드러낸 포경선은 때론 가치가 전복되는 공간이다. 


 결국 포경선의 상위포식자는 육지보다 바다의 시간이 길었던 베테랑, 그랬기에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다. 바다에 아버지와 형을 묻은 일등 항해사 스타벅, 고래에게 한 손을 잃은 어느 선장, 실종된 아들을 찾아 헤매던 또 다른 선장. 이들에게 고통을 가르친 고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에이헤브 선장의 다리를 앗아간 고래는 변치 않는 증오였다. 상실을 수용하지 못한 그의 광기 어린 집착은 포경선이란 공동운명체를 파멸로 이끌었다. 매 순간이 생존인 바다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결정권, 포경선엔 독단의 위험도 함께 타고 있다.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일까. 육지인가 바다인가. 어느 포경선 위 일까. 무대에 오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다, 새삼 내가 있는 객석의 초라함에 놀란 허둥지둥인 걸까. 갑자기 빨라진 듯한 시침에 목이 마르다 참참이 생각해 본다. 이미 나는 육지를 떠나 바다를 만났던 한 척의 작은 배, 선원이 아닌 선장이었다는 걸. 난파의 책임을 고래와 바다에 물을 수만은 없음을. 뭍에 닿은 이슈마엘의 다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미지의 바다에 나를 맡길, 승선이 아닌 항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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