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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Oct 14. 2023

나르시시즘의 호수에 던진 돌멩이

「구토」ㅣ 장 폴 사르트르 ㅣ 문예출판사



'한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꾼이며, 살든지 아니면 이야기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p.99).' 

조물주였던 사나이, 로캉탱 월드의 전제 조건이다. 시시각각 왜곡되는 인상으로부터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서른의 그는 홀로 글을 썼다. 자신만의 언어로 이룩한 천지 창조 속에서 그는 절대적 자유에 탐닉했다. 글 밖의 삶이 아닌, 글 속에 살던 그는 우연히 쥔 돌멩이가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공포에 몸서리친 그날, 스스로가 기생하는 존재임을 자각했다. 숙주는 지난 몇 년간 천착했던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 롤르봉이었다. 그의 멋진 삶을 연기하듯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로캉탱의 세계는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처럼 뿌리 채 흔들리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 몰락과 변화의 전말을 그는 '구토'라고 불렀다. 시공간의 이동이 불가한, 자유의지의 사망 선고를 받은 광물화된 인간으로 부유하며 그는 점차 벗어날 수 없는 구토의 정체에 가까워졌다. '구토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p.295).'


 영웅에서 구토로 정체성이 뒤바뀌고, 극도의 자기애가 극한의 자기혐오로 추락한다는 점에서 로캉탱 서사는 나르시시즘의 변주이자 패러디이다. 저주받은 어느 날, 숲에서 살기를 멈추고 호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나르키소스라면, 골방 속 호수의 이야기를 그만두고 거리를 배회하는 삶으로 나아간 것은 로캉탱이었다. 구토는 잔잔하던 나르시시스트의 호수에 누군가 몰래 던진 한 개의 돌멩이였다. 요동치는 물결에 아름다운 그대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환상은 조각났다. 그런데 구토가 로캉탱이라면 그 돌멩이를 던진 것도 로캉탱이다. 그는 불현듯 찾아온 감각에 건국의 아버지였던 자신을 의심할 줄 아는 존재였고, 일상의 균열을 추적하는 촉수의 예민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롤르봉의 망토에서 벗어나 구토로서, 다시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구토가 된 로캉탱의 삶은 이제 막 다리를 얻어 해변을 거니는 인어공주처럼 위태로웠다. 밀려드는 관념으로 팽창하려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그는 장소를 옮겨가며 살아있는 타인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화려한 휴일의 거리에서 부빌의 인파를 스치지만 물질적이고 몰개성적인 그들은 그저 '개자식들'일뿐이다. 도서관의 음습한 독학자는 휴머니스트를 표방했지만 추악한 모습으로 피 흘리며 사라졌다. 완벽한 순간의 연출자이자 로캉탱의 연인이었던 안니 조차 그의 변화를 환영하지 않았다. 결국 부빌리안도 독학자도 안니도 로캉탱의 불완전함을 구원하지 못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진정한 구토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대로 살 만한 현재의 삶, 그 안락함에 마비되어 자신이라는 삶의 좌표를 점검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비로소 로캉탱은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덜 소름 끼치는 것인 광물들 (p.361)'이라며 구토 이하의 인간들을 직시했다. 동시에 '잠시 숨 돌릴 틈을 주는(p.364)' 구토의 긍정성을 발견하며 부빌이라는 구토 이전의 이야기로 점철된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카페 여사장이 작별의 인사로 들려준, 그가 좋아했다던 재즈 음반 속 'Some of these days'는 그저 '순수한 존재'이고 싶은 잊힌 열망을 자극했다. 반복되는 선율 속에서 유대인 작곡가와 흑인 여가수를 떠올린 그는 문득 롤르봉을 발견했던 그때처럼, 다시 열정에 휩싸였다. 구토가 된 자신에게 생의 감각을 불어넣은 그들처럼 자신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희망이 생긴 것이다. 불멸의 인물 이야기로 살다, '구토'라는 불완전한 실존적 삶을 겪으며, 다시 새로운 영감을 따라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가려는 그의 마지막에서 예술이란 가공할 원심력의 나르시시즘을 떠올려본다.


 '한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꾼이며, 살든지 아니면 이야기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작가의 목소리를 곱씹어본다.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구상 가장 많은 개체 수의 동물이 인간인 것은 공통의 허구를 믿는 능력 때문이라고 유발 하라리도 말했다. 삶을 곧 이야기로 만드는 극도의 효율이 범람하고, 그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는 오늘, 과연 로캉탱식 구토는 가능한 걸까. 어쩌면 이야기가 삶을 압도하는 요즘일수록, 타인이 아닌 자신의 진실한 열망을 들여다보는 돌멩이의 사유는 더욱 간절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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