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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Feb 06. 2022

어쩌면 '반려생물', 헌법

「지금 다시, 헌법」을 읽고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헌법 해설서. 

새해를 맞아 큰맘 먹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말랑한 생각에 친숙하고 내면을 향한 에너지로 충만한 타입이라 완주까지 참 더딘 일독이었다. 이런 나를 '대선', '헌법'이란 낯선 고민 앞에 서게 한 것은 쉽게 잊고 지낸 그날의 애매함, 일말의 죄책감이었다. 2020년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베트남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했고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재외국민 투표는 사전 신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돌이켜보면 대학생 시절 중국에 있기도 했는데 그 당시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선거'를 의식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꽤 오랜 시간 이따금 정치 뉴스를 소비할 뿐인 퍽 무심한 국민이었다.


'그런데 헌법은 살아있다'. 이 책을 만난 후 뇌리를 맴도는 울림이다. 헌법은 거대한 화석과 같은 법전이 아니라 역사의 궤도를 따라, 세상의 흐름에 맞춰 변화를 멈추지 않는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 우리의 삶과 함께 작동하는 생명체라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다다랐다. 확고 부동한 것이 아니라 가변성을 띤, 축소된 삶의 현장이기에 그것이 잘 움직이고 있는지 여전히 숨 쉬고 있는지, 어딘가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공동 생명체인 우리는 충분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코로나 전에 떠나 코로나 후에 돌아온 한국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과연 이곳이 내가 몇십 년간 살던 곳이 맞나 싶을 만큼 생경해지는 일상의 풍경과 새로운 습관들 속에서 오늘 읽은 이 반려생물이 앞으로 어떻게 번성해나갈지 한 송이의 장미를 돌보던 소행성 주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려 한다. 지루함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학원가던 길에 무료로 애용하던 그 시절 '백화점 셔틀버스'의 추억, 프라이버시란 '혼자 있을 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원, 일주일에 최소 2회 자유로운 외출을 바란다는 독일의 장애인 무료 택시 카드 등 두터운 법문 속 보물찾기 같은 뜻밖의 뭉클한 감성들이 있어 따뜻했다. 누군가와는 공존해야 할 삶의 여러 경계를 무시로 고민하는 시민이 돼보자는 제안을 곱씹어보니 사회를 디자인하는 것이 '법'이라 좋았다는 누군가의 말이 그제야 끄덕여졌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는 카프카의 말이 너무 장엄한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이번엔 꽤 공감이 됐다. 바깥 세계와 내부 세계의 균형을 조율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 가보지 않은 바다 저편을 두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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