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결혼으로 새로 생긴 아버지

by 란님


결혼을 통해 내게 가장 큰 결핍이었던 '아버지'가 다시 생겼다. 어릴 적 엄마의 재혼을 통해 아버지란 대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내게, 새로운 아버지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이유와 계산 없이, 시작부터 아버님(시아버지)을 좋아하며 따르고 공경하였다. 게다가 아버님은 누가 봐도 키도 크고 잘생기셨다. 피부 관리 없이 살아오셔서 피부가 까매지긴 했지만, 우리 신랑의 단정한 얼굴 라인은 아버님에게서 온 것이다. 그 잘생김이 내 아이들에게도 어느 정도 이어질 것을 기대하니, 아버님이 미워 보일리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항상 시아버지를 좋게 포장해 주기 위해 공을 들이셨다. 틈이 날 때마다 장점을 어필하셨고, 아닌 척하면서 칭찬을 늘어놓으셨다. 어머님이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이 아버님과 결혼한 일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머님의 말씀에 따르면 시아버지는 집안과 임대건물의 많은 일을 혼자서 관리하는 만능일꾼이었다. 젊은 시절 포스코와 외환은행에 다닌 엘리트였으며,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온 덕에) 월급을 모두 본인 용돈으로 쓰며 지점장 급으로 비싼 차를 타고 골프를 치고 다니셨다고 한다. 결혼생활을 오래 하며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것만은 칭찬이 아니라 핀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끼니도 잘 못 챙기고 바삐 일하던 아내에게는 무관심하고, 자기만을 돌보던 무정한 남편에 대한 서운함 말이다. 또 한 가지가 궁금했다, 두 분이 일과 취미로 밖에 계시는 동안에 아이들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당시 전통시장 안에서 생활하던 가족들에게, 양복을 차려입고 은행으로 가던 시아버지의 존재 꽤나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집안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군 성과이니 프라이드를 가질 만하다. 아버님은 깐깐하게 돈을 관리하는 일이 적성에 잘 맞는 분이셨다. IMF로 인해 외환은행이 사라지며 실직을 하신 후에도, 시어머니가 차린 목욕탕과 건물을 알뜰하게 관리해 오셨다. 비용 지출을 아까워하시다 보니, 전기도 보일러도 소방관리도 모두 본인이 배워서 직접 해결하셨다. 성실하고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며 손 기술이 좋으신 분이라, 자리에 맞게 본인의 역할을 해내며 살아오셨다.


한편 시아버지가 며느리인 내게 종종 자랑하시던 것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경주월드(당시 도투락월드)에 가서 야구공 던지기 게임으로 인형을 따다 주신 이야기, 아버님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까지 자동차 여행을 다녀오신 이야기를 늘 반복하셨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이 두 번 말고는 가족여행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구나', 두 번째는 '결국 지나고 나면 뿌듯한 것도 아쉬운 것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기억뿐이구나'이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엄격하고 호되게 야단치는 아빠였던 것 같다. 나는 아버님이 살가운 아버지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여쭤보았을 때는 "그때는 다 그랬어"라고 하시며 대놓고 인정하지는 않으셨지만 말이다. 연세 지긋하신 지금이라도 '나는 너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단다'하고 다가가시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자식들을 더 피하시는 점은 아쉽다. 평생을 그리 살았던 탓에, 자식들은 아버지가 자신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먼저 손을 내밀어도 거절하시는 경우가 많으니,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먼 훗날 신랑이 후회하지 않게 해주고 싶어 마음만 졸일 뿐이다.


나는 아빠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았기에, 아버님께 잘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가족이기에 믿었고, 아버님의 연륜과 성실함을 존경하였으며, 매년 생신을 챙기려고 노력했었다. 가족모임의 행복을 함께 나누고, 본인이 아끼느라 못 사시는 근사한 걸 사드리고 싶었다. 그런 노력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내게는 남은 후회가 없으니 그걸로 되었다.


며느리 될 아이였을 때부터 용돈을 쥐어주시던 어머님과 달리, 아버님은 임신 때의 딱 한 번을 제외하면 내게 용돈을 주신 적이 없지만, 챙겨주신 것들이 있다. 지금은 단종되어 구하기 힘든 천 원짜리 구 지폐를 아주 뿌듯한 미소와 함께 건네주셨고, 수집해 두신 옛날 영사기와 놋그릇, 카메라 등도 내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비싼 건 아니지만 아버님이 아끼시는 물건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거라, 나는 그것도 좋았다. 가끔 우리 내외가 시부모님 댁에 가면 콩나물밥이나 전복죽을 직접 만들어주시기도 했다(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도 갖고 계신다). 또 내게는 안 주셨지만, 내 자식들(손주들)에게는 용돈도 덥석 쥐어주신다.


연세가 많아지고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시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청력이 많이 떨어지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운전도 잘하시고 친구분들과의 모임에도 나가시는 등 건재하신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아버님이 본인의 큰 형님과 따님들이 있는 서울로 가셔서, 지하철 무료승차 혜택을 누리며 산에도 다니고 노인회관에서 노래도 하며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 권하기도 하였지만, 아버님은 20대부터 평생을 살아오며 가정을 꾸렸던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혼자가 되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나는 그 점이 무척 아쉽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그것도 나보다 어르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받아들인다.


집안의 남자이고 가장이라고 하면 무쇠처럼 단단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도 강한 척하며 오랜 세월을 이 악물고 버텨낸 어린 청년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버님을 알게 된 지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나조차도 그동안 아버님께 과중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사실 아버님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힘이 무척 약하신 편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강도 높게 오랫동안 이어진 스트레스에 체념하여 약해지신 걸지도 모르겠다. 아버님이 부디 마음을 편안하게 바꾸고 고뇌를 내려놓은 채 즐거이 사시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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