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눈 뜨니 아침 7시,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길래 이불만 살짝 덮어주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나의 인기척에 누군가 깨기라도 하면 그대로 일과 시작이니, 소리 내지 않고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 최대한 조심했음에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셋째가 눈을 감은 채 내 쪽으로 기어와 안긴다. 품에 쏙 안았더니 다행히 다시 잠잠해졌다.
8시가 되자 신랑 휴대폰의 알람이 울린다. 발로 엉덩이를 툭툭 밀었더니 일어나 알람을 끄고 다시 눕는다. 9시에 야구연습이 있다고 들었는데 안 가는 거냐 물었지만, 잠이 덜 깨 횡설수설하다 다시 잔다. 셋째는 이미 침대 옆에 내려가 책을 읽고 있었고, 내 품에 안긴 아가는 첫째로 바뀌어 있다.
누워있기 답답하여 슬며시 나왔더니,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깨어난 신랑이 벌떡 일어나 쿵쿵 걸어 나온다. 잠이 덜 깬 채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이다. 나는 신랑의 모닝리추얼이 싫다. 흡연 자체도 싫긴 하지만, 잠이 덜 깬 채로 아무 생각 없이 피러 나가는 저 담배가 너무너무 싫다. 그냥 습관이기에 마음만 굳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일인데, 나아지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태만으로 보인다. 최소한 정신이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차라리 앉아서 멍을 때리라고 여러 번 권하였으나 변하지 않는다. 못 나가게 현관문을 고장내면 벼룩 잡느라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려나.
여러 기척에 아이들이 슬슬 깨는 것 같기에 "아빠 야구 연습하러 가는데 따라갈 사람?"하고 물었더니 자고 있던 둘째가 벌떡 일어나 "저 갈래요!"라고 한다. "가면 놀 사람 없어서 심심할 텐데 괜찮겠어? 아빠는 운동하느라 못 챙겨줄 거야" 물어도 자기는 꼭 가고 싶다고 한다. 둘째는 공놀이도 좋아하고,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 끼는 것도 좋아하는 것이 아빠를 꼭 닮았다(식성과 성품은 날 닮았다). 아빠와 밖에서 노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서둘러 준비하고, 아빠와 함께 바나나를 하나씩 까먹더니 야구장으로 출발한다. 새로 들어간 팀이니 인사 후 30분만 하고 오겠다길래 별 걱정 없이 보내주었다.
야구장으로 가는 길에는 눈여겨봐 둔 브런치 가게가 있기에 우리도 따라나설까 했지만, 네이버지도로 찾아보니 이번 달에 쉰다는 공지를 띄워놓으셔서 포기했다. 남아있는 아이 둘과 나도 바나나를 하나씩 먹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10시쯤 신랑의 전화를 받았다. 30분 정도 있다가 출발해서 오겠다고 하기에 아점 차릴 준비 한다.
밥을 안친 다음, 식재료를 꺼내어 싱크대로 옮겼다. 오늘의 메뉴는 계란전(계란 위에 다진 팽이버섯과 참치를 올려놓고 구운 것)과 두부만 썰어 넣고 끓이는 밀키트 김치찌개, 반찬가게에서 사둔 무나물 무침, 그리고 양파를 곁들여 구운 갈매기살이다. 다른 건 다 준비되었으니 고기만 구우면 되는데, 올 때가 다 된 것 같은 신랑은 전화를 안 받는다. 음식냄새가 풍기니 배가 고픈지, 빨리 밥을 달라는 첫째의 성화를 견디기 힘들어, 계란 전과 무나물만 식판에 담아 둘에게만 먼저 밥을 차려주었다.
밥을 다 먹을 즈음에야 신랑과 둘째가 도착했다. 11시 반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두 남자와 함께 고기를 구워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다. 아까 고기를 안 먹은 첫째도 옆에 앉아 한 점씩 냠냠 먹었다(셋째는 먹기 싫단다). 정확한 스케줄 공유를 해주면 한쪽에 시달리고 한쪽을 닦달할 필요 없이, 우리끼리 먼저 먹고 둘은 따로 차려주었을 텐데. 결과는 같지만 과정이 다르다. 결과적으로는 신랑이 불편한 대화를 조금 미루려다 나를 괴롭힌 꼴이다. 30분 하고 온다는 말을 믿은 내가 멍충이지. 그냥 똑바로 말을 하라고 좀.
설거지 후에는 앉아서 쿠키 만들기 놀이를 하기로 했다. 식품회사에서 나온 '토이쿠키 만들기' 키트를 활용하기로 했는데, 아직은 아이들에게 어려운지 표본을 보여주어도 똑같이 만들어내지를 못한다. 그나마 손재주가 좋은 셋째만이 사자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쿠킹클래스에 다녀오면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 오길래 어느 정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가이드 없이는 안 되는가 보다. 이래서 가끔은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살펴야 한다. 아이들의 정확한 수준을 파악해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다. 에어프라이어로 쿠키를 구워주고 설거지도 한 차례 더 하면서, 일련의 과정을 내가 직접 하는 것과 쿠킹클래스에 돈을 지불하며 보내는 것의 효용가치를 따져본다. 돈만 따지면 당연히 이게 저렴하지만, 퀄리티나 가르침, 진짜 만드는 기분 내기까지 포함하면 쿠킹클래스가 훨씬 좋은 것 같다.
할 일을 마무리한 신랑과 함께 외출한다. 1시간 거리인 옆동네에 매화 구경을 가기로 했다. 이동하는 동안 글을 쓰고 싶었는데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버렸다. 어차피 잘 거였으면 편하게 푹 잘 것을, 괜히 깨어보려 애쓰다가 아까운 낮잠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 '선교장' 매화가 예쁘게 피었다는 블로그를 보고 왔는데 밖에서 살펴볼 때는 그냥 그랬다. 다시 보니 3년 전에 올라온 글이었다. 사는 게 정신없다 보니 대충 봐서 잘 낚이는 것 같다.
멀지 않은 '오죽헌'으로 이동한다. 매화도 멋지게 피어있고 아직 만개하지 않은 목련나무도 너무나 멋있어서 흡족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오고 처음 와보는데, 그때의 기억과 달리 알차고 유익하며 볼거리도 많다. 크기가 적당한 것과 주차장이 분리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유 없는 반항심에 제대로 안 듣고 안 보면서 고루하다 생각했던 것 같아 반성해 본다. 우리 아이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많으니 반항심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미리 많은 경험을 접할 수 있게 해 줘야겠다.
봄꽃이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 근처 '허난설헌 허균 생가'에도 가보았으나 거긴 매화도 아직 다 피어나 있지 않았다. 작년 봄 사진을 찾아보니 겹벚꽃을 보러 왔었더라.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 달에 다시 봅시다. 이 동네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중국집이 있기에, 그곳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레드향과 망고를 잘라먹고, 씻고 책을 읽고 다리를 주물러 준 다음 잠들었다.
바쁘지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계절을 만끽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