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새벽 3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침실로 들어오는 빛의 세기가 순간적으로 강해졌거나, 외부에서 어떤 소리가 났거나, 옆에 있는 누군가 나를 쳤거나, 지진이 나서 침대가 흔들렸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꿈속에서 무언가 자극이 있었거나. 하지만 영문을 모르고 깬 내게는 이유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아이들 것과는 다른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신랑이 방에 있기는 한데 침대 위에는 없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다. 비몽사몽 간에도 어리둥절하다. 침대 위에 자신의 자리가 비어있는데, 밤에 잠들 때는 분명 침대 위에 있었는데, 왜 바닥에서 자고 있지? 와신상담인 건가? 이유가 있겠지? 다른 사람들도 결혼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이유가 있겠지'를 여러 번 되뇌며 사는지 궁금하다.
자기 전 보일러 온도를 낮추었더니 바닥에 냉기가 돈다. 온도를 다시 올리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누웠으나, 새벽 4시에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창밖으로 느껴지는 바람소리가 꽤나 거센 것 같은데, 어젯밤 옆방 창문을 아주 살짝 열어두었던 게 기억났다. 평소라면 그냥 뒀겠지만 신랑이 바닥에 누워 자고 있으니 신경이 쓰인다. 침실 바닥 온도에 영향을 줄까 싶어 닫고 와서 잤다.
아침 7시에 눈을 뜨니 셋째가 반갑게 맞이하며 안긴다. 신랑은 할 일이 있는지 1시간 전쯤 일어나 침실을 나갔다. 셋째도 잠시 안겼다 혼자 컴퓨터 방으로 이동하였기에, 두 아들과 나만이 암막커튼의 보호 아래 아침잠을 즐겼다. 누군가 옆으로 와 손을 잡아주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둘째가 사랑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시계를 보니 8시 20분, 이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첫째는 더 자게 놔두고 아이 둘만 먼저 양치한 후 물을 마시고 시리얼을 먹기로 했다. 얼마 전 밤새 꺼내두었던 우유를 아이에게 먹이기는 조금 불안해서 내가 처리하려고, 편의점에 가는 신랑에게 죠리퐁을 사다 달라 부탁했다. 엄마가 죠리퐁을 먹으니 아이들도 그걸 먹겠다 하여 아침부터 모두 과자를 먹게 되었다. 뒤늦게 등장한 첫째도 죠리퐁을 선택했다.
설거지와 빨래를 돌려놓은 후, 약속한 대로 어제 안 읽은 책을 읽어주고 같이 앉아서 놀다가 점심 준비를 시작한다. 어제 반찬을 미리 주문해 둔 덕분에 간편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3종류의 나물반찬을 꺼내어 잘게 자르고, 계란프라이를 올려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아이들에게는 메추리알 장조림을 함께 내주어 간장으로 비비게 하고, 엄마아빠는 고추장으로 비벼 먹었다.
또 한 차례 설거지를 한 후 조금 쉬다가, 옷을 갈아입고 할 일을 마친 신랑과 다 같이 외출한다. 30분 거리에 있는 옆동네에 놀러 가기로 했다. 그곳 양수발전소 위에는 '에너지팜'이라는 전시시설이 있다.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며 계속 못 가고 있었는데, 오늘로 딱 정해서 가보기로 했다. 지금껏 못 가본 이유는 운영시간이 조금 애매해서이다. 평일과 토요일에만 운영하고 휴일을 다 챙겨서 쉬며,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박물관이나 체험관과는 달리 진짜 발전소 위에 운영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동 중 아이들과 내가 모두 잠들었던 탓에 정말 들어가기 귀찮았지만 힘내서 30분 건 구경하고 나왔다. 고장 난 시설과 오래된 정보가 많아 아쉽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꽤 유익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근처에 찜해두었던 카페가 있어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 이미 짐작했지만 예상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잔잔한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잔디밭에는 구석구석 예술 수집품이 놓여 있고, 그 잔디밭을 조망하는 카페는 하얀색의 3층 높이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이 모든 배경의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준다. 카페 내부 역시 예술 수집품이 걸려 미술관처럼 꾸며져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그곳을 한가로이 노니며 주말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는 커다란 멍멍이의 존재였다. 아름다운 삶이다. 완벽하다. 카페 주변은 아름다운 전원마을이었는데, 시골이어도 바로 옆에 발전소가 있으니 전기 끊길 위험이 없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흘렀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가기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와, 동네 초밥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여름이면 물놀이장으로 변신하는 놀이터를 지나칠 즈음, 아이들이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물놀이장은 언제 개장하느냐고 물었다. 친절하게 세어본 후에 100일 정도 남았다고 했더니 봄이 싫다며 투정 부린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은 너무 더워서 바깥에서 놀 수 없잖아! 여름은 밤 날씨가 좋지만 너희는 미취학 아동이라 나올 일이 없으니까 제외하고! 그럼 그 사이인 봄과 가을에 밖에서 많이 놀아야지! 나가서 놀 수 있을 만큼 온화해지는 날씨에 감사하며 행복해해야 하는 거라고!"
그냥 '아고 속상하구나' 넘기면 될 일인데, 어쩐지 심하게 긁혀 과잉대응 해버리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올해로 여섯 살인 아이들이 계절을 즐기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 머릿속에서 부모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내려진 탓이리라.
내일은 마트 휴점일이라기에 간단히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오늘 집에 가서 읽어야 할 에그박사 15권도 구매하였는데, 마트에서 사면 할인 하나 없이 사야 해서 너무 아깝다. 시내에 있는 서점에서 사면 지역상품권으로 살 수 있어 할인율이 높고,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도 기본이 10프로 할인인데 말이다. 16권부터는 미리 준비해 둬야겠다. 집에 와서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일기를 쓰고 씻은 다음, 책을 읽어주고 다리 마사지를 하여 재웠다.
아이들이 잠든 후에 거실로 다시 나와 외투를 세탁하며 브런치에 연재할 글을 써놓고 잤다.
잠을 푹 못 자서 그런지 뭔가 정신없는 하루였다. 내일 아침에는 최대한 많이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