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이른 아침, 운동 나가는 신랑을 일찍 일어나는 셋째가 배웅해 주었다. 잠결에 일련의 과정을 들으며 '아빠는 행복하겠다' 생각했다. 더 자고 싶지만 셋째가 냉기 도는 거실에 나가 놀겠다고 하여 옷을 챙겨 입히려다 7시 반쯤 하루를 시작해 버렸다. 환기하며 씻고 빨래를 돌려놓고 나머지 두 아이도 옷을 입힌 다음, 물병을 준비하고 칫솔을 주고 시리얼을 먹었다. 8시 20분이 되자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자는 둘째를 깨웠다. 아이를 깨울 때는 보통 구체적인 메뉴를 들먹이며 어떤 걸 먹을 거냐고 물어본다. 뭘 먹을지 고민하여 대답하느라 눈을 뜨는 걸 보니 내 새끼가 맞다.
등원시켜 놓고 환기를 하며 아침 먹은 자리를 치우고, 주말 동안 얕은 청소로 더러움이 쌓였을 듯한 화장실을 강화된 버전으로 청소한 후,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니 9시 45분이다. 카카오 택시를 타고 바이올린 수업에 간다. 10시부터 궁능유적본부에서 경복궁 경회루/향원정 관람 예매를 시작한다고 하기에 시간 맞춰 기다렸지만,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홈페이지가 30분 넘게 다운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열어보며 속만 끓이다가 결국 실패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최첨단을 달리는 젊은 세대가 아니면 문화시설 향유도 못하고 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40대 초반인 나도 이럴진데 어르신들은 오죽하실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시간만 맞춰 들어가면 무리 없이 예약 가능했던 시설을 이렇게까지 경쟁해야 볼 수 있게 되다니, 높아진 인기가 오히려 아쉬움을 준다.
연습이 필요해 집으로 들고 왔던 바이올린을, 주말 내내 한 번 열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그대로 수업에 들고 왔다. 재밌는 건 연습을 안 한 것 치고 연주가 꽤 잘 나왔다는 것이었다. 소리가 매끄럽진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멈춤 없이 연주할 수 있었다. 이것도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면서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고 체화시키는 동안 약간의 쉼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혼자 연습할 때는 가능하던 연주가 합주만 하면 버벅거리는 건 도대체 왜일까. 여유가 부족한 채 쫓아가려다 당황하는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연주할 때와 달리 박자가 조금 빨라지니 기술이 못 따라가는 걸까. 둘 다인가?
동료와 같이 걸어오다 헤어진 장소가 마침, 생각만 하면서 못 가고 있던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의 앞이었다. 언니네 집에 갔을 때 내 휴대폰으로 그림을 그리던 조카가 내장된 펜을 망가트렸다. 괜찮겠지 생각하고 넣어두었더니 다음번에 뺄 때 반토막만 나오고 나머지 반이 안에 박힌 채로 남았기에 제거 수술을 하러 왔다. 다행히 펜이 없어도 방수기능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휴대폰 액정이 살짝 깨진 것은 방수기능에 문제를 발생시키지만, 액정을 수리하면 중고로 휴대폰을 구매하는 만큼의 비용이 나올 것 같다.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기능도 멀쩡하고 안에 담긴 추억이 너무 많으니,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새 휴대폰은 이미 사두었다). 어떤 형태로든 활용을 계속할 거라면 화면을 고쳐두는 게 맞기는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크다 보니 고민이 된다.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겠다.
길 건너편 카페에 가서 점심시간에만 할인해 준다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기 위해 앉는데, 같이 걸어왔던 동료의 말이 떠오른다.
"잘 모르고 이야기 들을 때는 부부사이가 많이 안 좋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랑이 너무 많아서 싸우시는 것 같아요."
맞는 말이다, 기대와 사랑이 너무 커서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늦지 않게 식료품 주문을 마치고 글을 쓰고 나니, 운동을 마친 신랑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용실에 간다기에 먼저 집에 가야겠다 싶었으나, 5층 짜리 다이소에 들어갔다가 1시간을 써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종이가방에 가득 담아도 5만 원이 안 나오는 곳, 너무 혜자롭다. 짐이 무거우니 미용실에 가기 전 나 먼저 태워달라고 해서, 신랑 얼굴을 잠깐 보고 귀가하였다. 청소 생각에 막막한 내 마음을 알았는지 "청소는 이따 애들이랑 같이 하자"라고 말하는 신랑에게 "오, 좋은 생각!"을 외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가기 전에 화장실 배수구에 부어두었던 세척제의 흔적을 씻어내는 것으로 오늘의 화장실 청소를 마무리한다. 주말 동안 잔뜩 쌓인 쓰레기를 분류하여 내다 버리고, 현관 청소 후 식기세척기 내부 설거지를 정리하는데 신랑이 등장했다. 보통 미용실에 가면 1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30분 만에 돌아왔으니 예약이 취소된 건가 했는데, 머리는 예쁘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숙련된 전문가 분이 빠르게 해주셨나 보다.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빠르게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효율적이라 좋은 것 같다.
하원한 아이들을 격려하여 집안 정리를 하도록 하는 신랑의 지휘가 능숙하다. 아까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라주었다는 그 미용사 분처럼,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정리해 나간다. 아이들이 만든 많은 것들을 죄다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린 것은 아쉽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으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식구들이 집안 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당근, 양파, 애호박을 씻어 잘게 다지고, 냉동새우를 썰어 넣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간이 너무 약하면 맛이 없으니 김자반도 뿌리고, 국을 좋아하는 신랑을 위해 두부를 썰어 넣어 끓인 밀키트 오징어뭇국도 낸다. 디저트로는 딸기를 내고, 아까 카페에서 사들고 온 신메뉴 초코빵을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엄마가 설거지하고 빨래도 돌리는 동안, 아이들은 차례로 씻으면서 아까 사온 클레이로 만들기 놀이를 한다. 다들 씻은 다음에는 에그박사 책을 읽어주고 다리를 마사지해 준 다음 재운다.
아이들이 잠든 후에 어른들만 일어나, 아직 10시가 안 넘었으니 야식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신랑과 둘이서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 것 자체가 재미이다. 내일 이불빨래를 해야 하니 오늘 잠들기 전에 쌓인 생활빨래를 마무리한다. 중간에 첫째가 흐느끼며 엄마를 찾아 잠깐 불려 들어간 것 외엔 고요한 밤이었다. 잠들기가 아까워 버티다 보니 깨어있던 시간에 비해 생산적인 결과물은 없지만, 가끔은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다음 날이 피곤하지 않게 조절만 잘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