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인간

3월 25일

by 란님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신랑을 찾아서, 눈을 뜬 아이들이 컴퓨터 방으로 따라 나가고, 침실에는 둘째와 나만이 남았다. 대폰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도 미세먼지는 나쁨이라고 떠있어 우울해졌다. 더 막막한 것은 내일과 모레까지도 계속 나쁨일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공기청정기 코드를 찾아 전원을 켰다. 오랜만에 트는 것이라 유해물질이 나올 것 같아 한동안 환기를 시키면서 세게 틀어뒀다. 시간이 지나니 공기의 질이 나아지는 느낌이 든다. 숨쉬기가 한결 편하다. 구입 당시 신랑이랑 싸우긴 했지만, 한 번 살 때 좋은 걸로 사두길 잘했다.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바로 출발해 시내버스를 타고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미세먼지가 나아지면 나의 증상도 나아질 것 같아 버텼는데, 대기 상태가 나아지질 않으면서 나의 비염증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계속 놔뒀다가는 폐렴까지 발전하겠다 싶어 무서우니 얼른 가서 약을 먹어야겠다. 씩씩하게 버스에 탑승했는데 교통카드가 안 찍힌다. 어제 새로운 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삼성페이를 옮겼더니 옛 폰의 교통카드 기능이 사라졌나 보다. 교통카드 리더기 옆에 서서 새 폰에 교통카드 기능을 설치하고 결제에 성공하였다. 편리한 세상, 불편한 삶이다. '혹시 몰라 만 원짜리 한 장은 늘 들고 다닌다'던 누군가의 발언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이비인후과 방문 후 약국에 들렀는데, 약사님이 뜬금없이 내게 어디 사느냐고 물으신다. 동네 이름을 말씀드렸더니 "해당 안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여기 이거 우리 아들이에요."라며 명함 하나를 내미셨다.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어느 정당 후보가 아드님이시란다. 성별과 연령대만 다르지, 명함을 건네신 약사님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새겨져 있어 웃음이 났다. "아, 그렇군요. 축하드려요!"하고 챙겨서 나왔다. 부부 약사님이 운영하시는 약국, 명함을 보니 아드님 역시 약사인 것 같은데 도의원에 출마한다니 뿌듯하시겠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상받는 세상이기를 바라 본다.


오랜만에 바이올린 수업에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나보다 먼저 오신 분들이 이미 대부분의 자리를 준비해 두셨다. 빈 공간에 몇 자리 더 설치한 후,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고령 멤버의 한 분인 선배님께서 "아우야, 이쪽으로 와"라고 불러주셨으나 감기에 걸려 병원까지 다녀왔다 보니 아무래도 불안하다. KF94 마스크를 쓰고는 왔지만 잠시 잠깐씩 마스크를 내릴 일도 있을 것이고, 손을 통해서도 감기 바이러스가 옮을 수 있으니 조심스럽던 중, 다른 동료가 나타나기에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여 한 칸 떨어져 앉았다. 이럴 거면 그냥 오지를 말았어야 했나 싶지만, 나에게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최대한 조용히 앉아있다 가기로 한다.


감기약을 먹으니 졸음이 쏟아지지만 정신을 다잡고 바이올린 연습을 했다. 잘하는 사람과 친절한 사람 사이에 앉았더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잘하는 사람이 연습에 임하는 자세를 보고 배우기가 좋았고, 친절한 사람의 (내 자세에 대한) 피드백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보답을 하고 싶지만, 나는 바린이니까 그냥 조용히 내 연습이나 열심히 하기로 한다. 선생님께서 우리 셋에게 연주를 시키셨을 때, 같이 하니 꽤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잘하는데요?"라고 말씀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제가 흉내를 잘 냅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멋쩍게 웃었는데,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다. 아직까지, 내가 하는 것은 연주가 아니라 연주 흉내내기이다. 선생님께서는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아래 파트 연주를 주문하셨다. 훑어보니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게 즉석연주가 가능할 정도의 실력은 없기에 하던 부분만 꿋꿋하게 연습하고 왔다.


수업이 끝난 후 같은 방향으로 같이 걸어오는 동료의 시간을 많이 뺏지 않기 위해, 오늘은 밥 먹자고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애매한 데다 신랑도 운동하러 나간지라 혼자 카페에서 샌드위치나 먹으며 쉬고 가려했었다. 그런데 동료가 식료품을 사기 위해 내가 가는 카페 근처로 걸어간다고 한다. 코 앞까지 같이 와놓고 혼자 쏙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결국 또 같이 먹고 가게 되었다. 대화하며 같이 식사하는 시간이 너무도 즐겁지만, 매주 붙잡으면 부담되는 게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 큰 사람이라 불편해도 말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내가 대신 걱정을 해주게 된다. 상냥함과 무례함의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은 어디쯤인가.

시간 맞춰 데리러 온 신랑과 함께 유치원으로 간다. 아이들을 픽업하여 동네 외곽에 위치한 미디어아트 뮤지엄을 방문하였다. 이곳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지역민 초청 이벤트를 열기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감사하게 방문하게 되었다. 큰 틀에는 변화는 없지만, 새로운 시설과 전시가 들어와 있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니 고마워서 리뷰라도 써주려고 사진을 잔뜩 찍어왔다. 브런치 글은 내가 기억하기 위해 쓰는 글이니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다른 이를 위한 홍보글을 쓰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몹시 귀찮아진다. 나는 생각처럼 친절하지 않은 사람인가 보다. 그냥 네이버지도에다 사진과 짧은 평을 올리는 것으로 갈음해야겠다.


뮤지엄 관람을 마친 후에는 아이들이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데려다주었다. 지난주에 늦어버려 이번 주에는 일찍 와야지 다짐했는데, 일정을 하나 더 소화하는 바람에 지난주보다 더 늦고 말았다. 다음 주에는 정말로 늦지 말아야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하며 놀았다. 둘째를 데리고 온 엄마들 사이에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우리 아이들도 아직 많이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더 어린아이들과 비교하니 꽤나 사람다워 보였다. 잘 자라주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아이 셋을 키우는 내 입장도 만만치 않긴 하지만,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을 동시에 키워내는 엄마들에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주차장에서 아빠를 만나 근처 샤브샤브집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아빠가 야구연습에 가는 날이라 서둘러야 한다. 한창 못되게 굴 때 같았으면 우리야 어떻게 하든 말든 신랑 혼자 연습하러 가버렸을 텐데, 오늘은 연습에 늦더라도 저녁을 먹인 다음 집에 태워주고 출발할 건가 보다. 그래야 마음 편히 더 오래 운동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걸까. 나는 아무 말 안 했는데 스스로 그런 판단을 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예쁘고 고마워서, 저녁 목욕은 내가 혼자 시키기로 했다. 서로 조금씩만 배려하면 훨씬 따뜻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 가득 쌓인 택배를 뜯어 새로 산 옷을 세탁해 놓고, 아이들 물통을 비롯한 아침 설거지를 식기세척기에 넣은 다음 아이들 목욕을 시작했다. 차례대로 한 명씩 욕조에 들어가 잠시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나는 화장실 앞에 앉아 글을 썼다. 글을 쓰려면 자투리 시간 활용이 필수이다. 세 명을 씻기려니 허리도 아프고 짜증이 나지만, 신랑에게는 쿨한 척하며 "내가 목욕시키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와"라고 말해 본다. 아이들에게도 쏘 쿨하게 짜증 내지 않으면 참 좋을 텐데, 씻고 나서 마무리할 때 집중 않고 장난만 치는 셋째에게 결국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육아를 하면서 '거대자기' 마인드를 많이 잃었다. 나는 그저 나약하고 비루한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깨닫는다.


책 읽어주기가 한창일 무렵에야 신랑이 돌아왔다. 아이들과 인사하고 씻으러 들어가길래, 우리끼리 책 읽기를 마무리하고 다리도 마사지해 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평온하게 잘 자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기청정기를 방 안에다 옮겨놓고 유치원에 쓰고 갈 면 마스크도 세탁하여 널어두었다. 오늘 하루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녔더니 마스크에서 흙먼지 냄새가 나더라. 미세먼지 속 오염물질이 상당한 것 같다. 미세 플라스틱 흡인이 싫어 피했던 마스크 착용을 당분간은 하고 다닐 생각이다. 아이들에게도 마스크를 줘야 하는데, 먼지 차단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미세플라스틱이 적은 면 마스크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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