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방학이 끝났다. 방학 동안 엉망이 된 생활리듬을 알고 배려한 것 마냥 오늘은 10시 반까지 등원이다. 천천히 일어나 여유 있게 준비하고 온 가족이 함께 등원한다. 새 학기라 입학식을 하는데, 유치원 입학생이 2명뿐이라 재원생 모두에게 입학허가서와 꽃다발을 수여해 주었다. 작은 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덕분에 호강한다. 내 아이를 귀하게 대해주는 곳을 싫어할 부모는 없다.
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들과 함께 진행된 입학식이라,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외에 재학생 대표의 축사도 있었는데 6학년 남학생은 말도 안 되게 늠름하다. 6세인 우리 아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저 아이도 요만할 때가 있었겠지,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 저 아이만큼 자라겠지. 그 기간 동안 부모는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자라지 않는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되리라.
입학식이 끝난 후 부모는 가져갈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신랑에게 오랜만에 점심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자기는 가기 싫다며 집으로 그냥 와버렸다. 삐친 걸 넘어서 화가 난다. 가기 싫을 수는 있지만 나의 의견 따위는 자신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너무나도 무례하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막막하다. 신랑이 떠난 차 안에 남아 잠시 화를 식히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명절이 지나면 부부싸움을 한다는데, 방학이 끝나도 부부싸움을 하는 걸까. 싸울 거면 아이들이 없는 지금이 적기이다. 이야기 좀 하자고 하니 신랑은 피한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딪쳐야 한다. 이야기는 과열되고 싸움이 되어 서로를 할퀸다.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를 밀치기도 한다. 그렇기에 밤에 이야기하자는 신랑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불안해하고 이웃들은 고통받을 것이다.
상처받은 눈빛에 마음이 약해진다. 짚고 넘어갈 일을 걸고넘어진 것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미안해진다. 이게 신랑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나는 싸우다 보면 신랑이 안쓰러워 감싸주고 싶어 지는데, 신랑은 그렇지가 않다. 신랑은 그저 자신의 모든 불행을 내 탓으로 돌린다. 신랑에게는 내가 신처럼 거대한 존재인가 보다. 신랑 삶 속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는 다 나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중세시대 유럽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배우자 손에 의해 마녀로 지목되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가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항상 잘한 쪽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차이만이 있다. 특히 부부싸움은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이해하고 맞추어 갈 준비가 되어있느냐가 중요하다. 작은 전투에 이긴다고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부부싸움이라는 건 전쟁을 이기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신랑이 원하는 것은 지금처럼 내가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지내면서 불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생활비도 대폭 줄이고 자기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길 바란다. 신랑은 나와 무언가를 같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나는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하여 결혼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해주면 좋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공통의 분모를 만들고 추억을 쌓아나가며 오손도손 살고 싶었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좋은 부모로 살고 싶었다. 신랑은 사회에 내보이는 가정의 틀은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함께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결혼생활에서 원하는 것이 너무 다른데, 조율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신랑이 혼자 외출한 후, 혼자 남아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방학 동안 바빠서 처리하지 못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한다. 하원시각에 맞추어 아이들을 픽업해 오니 가방 안에 새 학기 선물이 한가득이다. 오곡찰밥을 안치고 나물반찬을 주문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라 집 앞 바닷가에서 달집 태우기 행사를 한다.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 처음으로 접했던 우리나라 민속행사 중 하나이다. 우연히 접한 이후 매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파도가 몰아치는 드넓은 해변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운다. 개인이 해내기 힘든 일이니, 행사가 있을 때 구경 가야 한다.
7시에 점화식을 한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6시 반이다. 장갑을 찾아 끼고 옷을 입고 나가니 6시 50분인데, 벌써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작년에도 그랬다, 정해진 시각에 나갔더니 이미 시작했었다. 작년에 당해놓고 올해 또 당한 내가 멍청이다. 내년엔 30분 일찍 나가리라. 바닷가에서 쌓인 눈을 만지며 놀다 천천히 다가가니 10분이 지났는데도 잔불이 꽤 크게 남아있다. 오후 내내 눈보라가 몰아쳐 행사가 취소될까 걱정했는데, 달집 태우는 시각에 맞추어 눈도 비도 바람도 그쳤다. 가까이 다가가 불멍을 하다가 펑펑 터지는 소리에 뒷걸음질 친다.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으니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위험하다.
배가 고프다 성화인 아이들을 가까스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물과 오곡찰밥을 비벼 비빔밥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안 먹는다 할까 봐 김자반도 잔뜩 넣어 비볐다. 다행히 맛있다고 먹는다. 어른들은 비빔밥에 콩나물 김칫국을 곁들여 먹었다. 다 먹고 난 후에 부럼을 까먹으려 마카다미아넛을 가져왔는데 한 봉지를 탈탈 털어 먹어도 부족한지 아이들은 입맛을 다셨다. 디저트로 딸기까지 먹고 난 후에, 씻고 치우고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종일 틈틈이 돌린 이불 빨래는 자기 전에 딱 완성되었다.
오늘 블러드문이 떠서 타 지역에서는 달구경도 한 것 같던데, 이 지역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달맞이는 못했다. 그래도 달집 태우기, 오곡밥과 나물반찬 먹기, 부럼 까먹기를 하였으니 만족한다. 우리 가족, 올 한 해도 건강하고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