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3월 4일

by 란님


아침에 일어나 환기를 위해 커튼은 열었다. "우와!"

멀리 보이는 산의 설경이 역대급이다. 마치 cg 같다. 어제 오후 내내 눈이 내렸어도 도심은 깨끗한데 산에는 눈이 잔뜩 쌓였다. 재미있는 게, 특정 높이에 만들어진 경계선을 중심으로 위는 하얗고 아래는 눈의 흔적이 없다. 산간지역과 도심지역의 온도차가 꽤나 큰 것 같다. 서둘러 사진을 찍어 보았으나 눈으로 보이는 만큼의 장엄함이 담기질 않는다.


아이들이 등원한 후 빨래를 분류하여 돌려놓고, 건조기 속 빨래를 개어 정리한다. 어제 유치원에서 받아온 색연필과 사인펜에 네임스티커를 부착해 돌려보내야 한다. 어제 잠들 무렵에야 생각이 났는데, 아침에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냥 보냈다. 그런데 유치원 밴드에 오늘 방과 후 수업이 미술놀이는 공지가 떴다. 새 학기에는 스케줄이 새롭게 편성되어 일을 기억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방과 후 선생님께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내본다.

"선생님, 오늘 미술수업 시간에 색연필이 필요할까요? 혹시 필요한 거라면 점심시간에 살짝 가져다 놓겠습니다."

필요하면 구비된 걸 쓰면 되니 그냥 내일 보내달라고 하신다. 헬리콥터 맘처럼 보였을까 걱정이다.


우리 집은 아이가 셋이라 72개의 필기구에 각각 네임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작년에 한 번 해본 덕분에 올해는 의류용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다. 의류용은 단단히 붙어있는 편이라 투명테이프로 이중 작업 할 필요가 없다(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색연필과 사인펜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붙이는데, 글쓰기 모임 화방에 메시지가 왔다. 눈구경하러 산에 드라이브 는데,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주겠다고 한다. 정말 정말 가고 싶지만, 빨래도 많고 색연필에 이름도 붙여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니 참는다. 먼지투성이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 들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동료는 본인도 아이를 픽업하러 2시에는 돌아와야 하니, 다녀와서 하라고 제안한다. 집안일은 오후에 해도 되고 저녁에 해도 되지만, 눈은 녹아버리면 못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산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깊어진다. 멀리서 보는 풍경도 멋있지만, 가까이서 보니 현재감이 있다. 설경 속으로 들어오니, 머릿속도 맑아지는 것 같다. 제설차량이 흔적을 남겨 도로 옆으로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설벽이 형성되어 있다. 보이는 나뭇가지마다 눈이 가득 쌓였지만, 따뜻한 햇살에 녹아 똑똑똑 떨어지는 중이다. 흙 위에는 눈이 았어도, 돌바닥에는 흙탕물 고여 걸음마다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물을 튀긴다.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거대한 문이 있는데 그곳을 지 때에 처마에서 떨어진 눈덩이가 마침 내 부츠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의 발걸음과 눈의 낙하가 절묘하게 만났다. 지점도 시점도 딱 맞아떨어졌다는 게 너무 재밌다.


설국 속을 걷다 아는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공원 안쪽의 사찰까지 돌아보고 나왔다. 2시간 동안 사진을 300장 가까이 찍었다. 정리하려고 살펴봤는데 버릴 게 없어서 큰일이다. 연이 만들어낸 설경 속에서 이리 오래 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이 난다. 집 근처에서 밥을 먹고 나니, 동료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버려를 마시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다. 초딩맘은 유아맘보다 더 바쁘다는 게 이런 걸까, 파이팅을 외쳐본다.


돌아오니 신랑이 없다. 밖이라기에 아올 때 오늘부터 판매하는 슈크림 딸기라떼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고, 내 할 일을 시작한다. 빨래를 하면서 네임스티커를 마저 붙여놓고, 글을 쓰고 청소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돌아온다. 애들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킥보드를 타러 나갔는데, 첫째는 엄마와 겠다며 집에 남았다. 엄마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은지 빨래 개는 엄마 옆에서 조잘대는 게 사랑스럽다.

어른이 되어도 그렇게 해줄 거야, 아들?(사랑해)


저녁으로 가스를 달라는데 사둔 게 없다. 오늘은 고등어구이를 해주려고 했건만, 아이들이 들고 온 급식일정표를 보니 내일 점심에 고등어구이가 나온다고 한다. 돈가스 두 장을 얼른 주문하고, 반찬가게 표 고등어조림을 여 신랑 앞에 뒤 함께 나물 비빔밥을 먹었다. 아이들에게는 배달 온 돈가스를 잘라 소스를 뿌고, 참송이버섯볶음과 함께 내어주었다. 밥 먹은 걸 치우고 씻으니 8시이다. 돈가스는 미리 사두지 못했지만 에그박사 12권은 미리 주문해 두었다. 양치질하고 책 읽고 다리를 주물러 준 후에 다 같이 잠들었다. 아빠만이 잠들지 못하고 일할 게 있다며 일어나 컴퓨터방으로 간다. 가장의 무게란 저런 것일까, 파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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