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아침 7시 반에 눈을 떴다. 거실로 가서 건조기 속 빨래를 꺼내어 갠다. 언니네 집에서 자고 갈 계획은 없었던지라 옷을 챙겨 오지 않았다. 어젯밤 잠옷을 빌려 입고 외출복은 세탁하여 건조기에 맡겨둔 채 잠들었다. 눈 뜨자마자 생각나는 게 빨래라는 게 조금 불쌍하지만,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어떤 이는 물가에 살면 우울감이 높아진다고 하던데, 나는 물을 바라볼 때 마음이 평온해진다.
오늘은 계획에 없던 날이라 아무 일정이 없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이 이모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 같다.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한 의견은 없으나, 뭘 사고 싶은지에 대한 의견은 있다. 첫째 조카는 쿠앤크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고 하고 둘째 조카는 로제떡볶이를 사달라고 한다. 셋째와 넷째는 아직 요구사항이 없어 다행이다. 엄마는 오늘 친구분들과 점심약속이 있다고 하시니, 언니와 형부의 일정을 파악한 후 결정해야겠다.
엄마는 외출하시기 전에 시간을 쪼개어 자식들을 위한 아침상을 차리신다. 감사하고 따뜻한 일이지만 달갑지는 않다. 먹은 걸 치우는 것은 언니와 나의 몫이 될 것이고, 1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엄마가 치워주신대도 죄송할 것이다). 저녁 7시 차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동시간을 제외하면 내게는 7시간 남짓의 시간이 있다. 거기에 식사를 한두 번은 더 해야 할 테니 조카들과 놀 수 있는 시간은 5시간 정도인데, 그중 1시간을 부엌일에 쓰라는 것이다.
또 아이들과 다니는 모든 일정은 대부분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 정도 사이가 가장 효율적인데, 출발시각이 늦어질수록 할 수 있는 일도 적어지고 사람도 많아진다. "어차피 밥은 먹는 것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나가서 사 먹으면 함께하는 식사시간이 되지만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 아이들과 어른들이 각자 보내는 시간이 된다. 아이들과 노는 일에는 체력이 많이 필요한데 아침에 하기 싫은 일을 1시간 해버리면 체력과 기력이 많이 빠지는 것도 이유이다. 아침시간의 기분이 하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느냐는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
달갑지 않은 티를 내면 엄마가 속상해하실 것 같아 말을 삼켰지만, 오늘따라 다들 밥도 안 먹어서 더 화가 난다. 형부와 나만이 한 그릇씩 먹고, 아이들은 대부분 3분의 2 이상 남겼다. 평소 잘 먹는 우리 둘째조차도 그러했다. 엄마는 외출 준비할 시간을 쪼개어 밥상 차리기에 1시간을 할애하셨고, 덕분에 우리도 외출준비를 1시간 미뤄야 하는데, 정작 아무도 아침식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일에 시간과 체력을 계속 바쳐야 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밥 차리고 치우느라 체력과 시간을 뺏겨 함께할 추억을 쌓지 못한다는 것이, 매번 내게 좌절감을 준다. 엄마는 자식들이랑 뭔가를 하고 싶어하시지는 않고 그저 밥만 차려주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모두의 준비가 끝나니 12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우리 둘째와 세 명의 초딩 조카들은 나와 함께 먼저 나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초등 고학년인 두 조카는 아이스링크에 보내고 나머지 쪼꼬미들은 세라젬 키즈카페에 넣어놓기로 결정하고 목적지로 이동했는데, 세라젬 키즈카페가 문을 닫았다. 1월부터 닫았다는데 롯데월드에 몇 번이나 와놓고 몰랐다는 게 조금 어이없다. 내가 얼마나 차안대를 착용한 말처럼 달리면서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사례 같았다.
벌써 점심시간이라 또 밥을 먹어야 하나 했는데, 같이 오지 않은 형부를 두고 우리끼리 밥을 먹을 수는 없다는 언니의 말에 콜팝을 사 먹였다. 언니는 모든 일에 항상 형부가 우선이다. 나는 어른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걸 믿기에 언제나 아이들이 우선이다. 신랑은 충분한 자립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지만, 어쩌면 신랑 입장에서는 그게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락실에 가서 원하는 게임을 3개씩 하고, 마실거리가 필요해 백화점 라운지에 들렀다. 언니가 음료를 들고 나오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소위 VIP들이 드나드는 럭셔리한 어른들의 공간에 있다가,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급식소로 변해버리는 것이 웃기다. 다과를 나누어 먹고, 아동 층으로 이동한다.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셋째 조카에게 입학선물을 사주기로 했다. 두 언니에게는 킥보드를 사줬지만, 요즘은 킥보드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분위기라 필요한 물품을 고르라고 하여 운동화를 사주기로 했다. 나는 신발을 살 때 언제나 세일기간을 활용하여 최대치의 혜택을 누리면서 적당한 걸 구매하지만, 조카 선물을 사주는 거니까 매장에서 아무거나 고르라고 말했다. 정가에서 백화점 우수회원(언니) 할인 10프로만 받아서 신발을 구매한다. 세일 없는 구매는 내 입장에서는 꽤나 과감한 소비였지만, 받아 든 입장에서는 썩 만족스러운 선물 같이 안 느껴지는 눈치이다.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한 걸 받은 게 문제였을까. 부족함 없이 사는 세대이다. 부럽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셋째 조카가 선물을 고르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레고스토어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 집엔 레고 클래식과 조립판이 있으니 살 필요가 없고, 세 명의 초딩에게만 작은 레고 제품을 하나씩 사주었다. 이후에는 첫째 조카와 우리 둘째만 데리고 교보문고에 갔다가 주스와 쉐이크를 사 먹였다. 언니차를 타고 돌아오니 외출하신 엄마가 어느새 귀가하셔서 또 밥을 차리고 계셨다. 우리 엄마는 사회생활은 좋아하셔도 밥 짓고 애 키우는 일은 안 좋아하시는 분인데, 딸(언니)을 위해 하고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감사할 일이다. 엄마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안쓰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식사가 끝나기 전 둘째 조카가 원하던 로제 엽기떡볶이가 도착하여 함께 먹었다. 하나만 시키면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조카 셋과 나만 먹는다. 쪼꼬미 둘은 매워서 못 먹고, 엄마는 배가 부르다고 안 드신다. 형부와 언니는 '그걸 또 먹을 수 있어?'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결국 반 이상 남아 저녁에 한 번 더 먹었다.
언니와 형부는 잠시 외출하고 아이 다섯(조카 넷+우리 둘째)에 엄마와 나만 남았다. 나도 집에 가야 하는데, 조카들만 두고 가기가 왠지 미안하다. 종일 열심히 쫓아다니느라 다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왠지 아이들이 원하는 걸 해주었다는 느낌이 안 든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이라 그럴 것이다. 오늘 종일 함께 있었어도 "이모랑 나랑 그때 뭐 했었잖아요"라는 기억은 남지 않을 것 같다. 아쉽다. 무엇보다 나를 따라온 둘째 아이가 너무 서운할 것 같다. 금요일에는 어른들 스케줄을 따라다니고, 토요일에는 사촌누나들 일정에 들러리만 섰는데, 이대로 집에 간다면 너무 서운하지 않을까.
신랑과 두 아이는 코코몽 키즈카페에 갔다고 한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주 밝은 걸 보니 엄마가 없어도 잘 지내는 것 같다. 하루 더 있고 내일은 둘째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잔뜩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가기로 정하니 저녁시간이 아주 여유롭다. 엄마방에서 마사지베드에 누워 마사지를 받다 한숨 잤다. 둘째 아이는 사촌들과 티비를 보다 소파에서 잠들었다. 낮잠 후, 돌아온 언니네 부부와 함께 밥을 먹고 순서대로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언니와 나만이 다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둘이서 낮에 사 온 빵을 먹으며 조카들의 진로부터 우리 둘의 추억, 얼마 전 다녀온 여행, 신랑들과 엄마 얘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새벽 3시이다. 아직도 할 얘기는 너무 많지만 내일을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언니의 밤이 평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