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업무는 결국 시스템언어로 옮겨져야한다.

— 사내변호사와 ‘일의 구조’를 만드는 일

by 송송


말로 떠도는 일과 문서로 남지 않는 책임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업무는 명확하게 지시되고 문서화되지만,
어떤 일은 늘 말로만 떠돌다 사라집니다.


“이건 그냥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건 원래부터 저한테 들어오던 일이에요.”
“그건 예전에 이렇게 처리했었죠, 아마…”


이런 말들 속에는 경계가 모호한 책임, 명확하지 않은 기준,
기록되지 않는 리스크가 함께 얽혀 있습니다.


사내변호사로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런 ‘말로 떠도는 일들’을
실제 책임의 언어, 프로세스의 언어로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예기치 않은 휴직이 알려준 진실


저는 개인 사정으로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업무를 정리하려고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일이 제 안에만 들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계약 검토의 우선순위 기준

담당자 간의 암묵적 업무 분배 방식

이슈 발생 시 자연스럽게 따라온 보고 순서

특정 자문 유형에 반복 사용되던 문장 패턴들


모두 문서에 정리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알고 있었고, 제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제 머릿속에만 있었던 겁니다.


‘내가 없으면 일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한편으론 자부심일 수 있지만,
조직 관점에서는 명백한 리스크였습니다.



반복되는 비효율의 악순환 - 구조가 없으면 결국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업무를 하는동안 비슷한 질문들, 비슷한 실수들, 비슷한 혼란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같은 자문을 다시 설명하고

이미 검토했던 계약을 다시 뜯어보고

리스크 판단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 충돌이 생기고…


법무 업무는,
많은 조직에서 ‘전문가 1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입니다.


사내변호사는 회사 전체에서 법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내부 전문가이고,
그만큼 신뢰도 받지만,
그 일의 구조와 기준은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무의 흐름이 매번 새로 만들어지고,
같은 이슈에 대해 다른 결론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혼란이 기록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업무를 ‘시스템의 언어’로 구조조정하기


말로만 떠도는 업무 내용들을

기준, 문서, 템플릿, 정책의 형태로 옮겨가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우리 조직이 필요로 하는 ‘시스템의 언어’로 업무를 구조화하는 작업입니다.


법무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그런 언어로 옮겨야 할 부서일지도 모릅니다.



사내변호사, ‘사내 법률사무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


사내변호사의 역할은 단순히 법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판단이 조직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만들고, 문서화하고, 시스템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잘 일하는 법”을 구조로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GPT같은 생성형 AI가 도입되는 시대에는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과,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의 경계가 갈라지게 됩니다.
이때 사내변호사는 그 ‘경계’를 가장 먼저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업무를 남이 이어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요즘 제가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는 물음입니다.

내가 만든 보고서는 누가 와도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만든 검토 기준은 반복될 수 있는가?

내가 빠져도, 팀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일은 ‘조직의 지식’이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조화는 ‘정리’가 아니라 ‘살리는 일’


많은 사람들이 “정리하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시간 낭비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구조화는 일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일을 이어가게 하고,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업무를 시스템의 언어로 정리하면,

다른 사람도 이해하고 재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일의 흐름이 남게 됩니다.
그 덕분에 같은 실수를 줄이고,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시간을 아껴줄 수 있습니다.
그건 결국, 조직 전체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죠.


사내변호사의 일은 때로는
‘내가 알고 있는 전문지식’보다도,
그 지식이 어떤 순서로,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공유 가능한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구조가 갖춰질 때,
비로소 우리는 AI든 누구든 그 위에서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Ep.6 예고

시스템화는 거창한게 아니다 — 티나지 않는 일을 구조화 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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