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시스템화는 거창한 게 아니다

— 티 나지 않는 일을 구조화하는 방법

by 송송



시스템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건 원래 이렇게 했어요.”

이 말은 법무팀에서 정말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처음 들으면 별생각 없지만,

몇 번 반복해서 듣고 나면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정리된 기준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해오던 대로’라는 말에는 수많은 암묵적 지식, 개인의 감각, 그리고 팀 내 경험의 축적이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사람에게 인계할 수도 없고, AI나 시스템이 이해할 수도 없는 정보입니다



말로 처리되는 일은 기억에만 남고, 시스템엔 남지 않는다


사내변호사로서 일하다 보면, 계속해서 말로 처리되는 일,
문서로 남지 않는 판단, 기준 없이 반복되는 자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입니다.

“이 조항은 항상 문제 되니까 주의해서 봐야 해요.”

“그 자문은 지난번에도 했던 건데, 그때랑 비슷할 거예요.”

“그건 공시 안 했어요. 그냥 내부 정리만 했던 건데요.”


이런 말이 반복될수록, 법무팀의 일은

기준과 흐름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기억과 말솜씨에 의존하는 구조로 바뀌게 됩니다.
그건 굉장히 불안정한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인사이동, 휴직, 퇴사 등 변수 하나만 생겨도

그 일은 곧장 공백이 됩니다.

기억에만 남은 일은, 결국 조직에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구조화란 결국 ‘누가 해도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일’을 만드는 일


그래서 저는 반복되는 말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말을 문장으로, 문장을 항목으로, 항목을 시스템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건 원래 이렇게 했어요.” 그 말은 일의 기준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럴 땐, 기준표로 바꿔서 정리하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왔다’는 말은 무언가를 구조화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또, 자문을 하다 보면, “이런 자문은 자주 들어와요.” 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은 흘려보낼 게 아니라, FAQ 문서나 자주 쓰는 자문 템플릿으로 정리해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담당자가 또 처음부터 설명을 듣지 않고도,

같은 수준의 판단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계약서 검토 중에도, “이 조항은 특히 주의해야 해요.” 라는 말이 오고 갑니다.

이런 말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를 리스크 체크리스트나 유의 조항 리스트로 남겨두는 것이

팀 전체의 리스크 감지 능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자주 듣게 되는 말.

“그건 내부 기준이라서 그냥 그렇게 해요.”

회사 내부 기준이라는 말 뒤에는 문서화되지 않은 불명확한 기준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행은 필요할 수 있지만, 공식 정책으로 정리되지 않으면 팀 밖의 사람들과 공유되기 어렵고,

새로운 구성원은 늘 “그냥 그렇게 하던 걸” 따라 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떠도는 내용들을 기준, 문서, 템플릿, 정책의 형태로 옮겨가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우리 조직이 필요로 하는 ‘시스템의 언어’로 업무를 구조화하는 작업입니다.


이런 작은 정리가 반복될수록
‘법무팀의 일이 사람에게서 팀으로, 팀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합니다.



법무 시스템화는 ‘통합’이 아니라 ‘구조화’에서 시작된다


사실 구조화는 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정리할 의지와 반복되는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만 있어도, 시스템화는 시작됩니다.


많은 조직은 시스템화를 말할 때,
‘한 번에 모든 걸 묶자’, ‘툴을 바꾸자’, ‘자동화를 하자’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무엇을 묶을 것인가”, “왜 묶는가”, “그 판단은 어떤 기준을 따르는가”에 대한 정리입니다.


제가 경험한 시스템화의 출발점은 늘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계약서에 붙는 파일명이 제각각이던 걸, 형식 통일하기

자문이 들어올 때, 자문요청사항 및 문제되는 사항 등을 적도록 양식을 만든 일 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툴 없이도 할 수 있는 구조화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법무팀이 먼저 구조화돼야 하는 이유


사내 법무팀은 사실상 전사 리스크의 마지막 관문입니다.
계약, 자문, 공시, 법률검토, 규제 대응 등
모든 흐름에서 ‘마지막에 체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판단의 기준은?
그 흐름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자문 결과는 시스템에 남아 있나요?

검토한 계약은 추적 가능한가요?

누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나요?


이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하면,
법무팀은 결국 성과 없는 부서, 비표준 업무 부서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법무팀은
시스템의 언어를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부서일지도 모릅니다.


시스템화는 나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는 구조화와 시스템화가
조직을 위한 일인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내가 만든 기준이 있으면,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만든 자문 템플릿이 있으면,
‘문서 잘 쓴다’는 말 대신 ‘이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만든 체크리스트가 있으면,
실수로 인한 오해나 책임 소재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즉, 시스템화는 전문성을 기록하는 도구이자, 법무팀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언어가 됩니다.



“당연한 일을 시스템으로 만든다”는 말은,
사실 당연한 걸 의심하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이건 원래 이렇게 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하나요?”라고 되묻는 것.
그리고 그 대답을 문서화하고, 기준화하고, 설명 가능한 구조로 옮기는 일.


그게 바로 법무팀이 조직 안에서
‘지식의 허브’로 진화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이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남도록.

그래서 법무팀은 ‘티 나지 않는 정리’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다음화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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