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강 때 영어 수업을 듣는다고?

될성부른 사서 고생 전문가

by 산토리니

입학식 전후로 교내 곳곳에 뿌려진 전단을 통해 학교에서 하는 'ESP'라는 영어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취업을 위해 어학 성적이 필수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던지라 관심이 생겨 홍보물을 유심히 살펴봤다. 일정 출석률과 TOEIC 성적을 넘기면 강의료를 환급해 주고, 하루에 한 번, 공강 아무 때나 들으면 되는 방식이라 시간에 대한 부담도 없다고 소개했다. 6개월이나 수업을 하는데도 시중 학원의 한 달 가격도 하지 않을뿐더러, 교재와 모의토익 응시 기회도 준다고 해서 홀린 듯이 신청을 하게 되었다. 마침 같은 과 동기도 이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같이 다니기로 했다. 이렇게나 광고가 무섭다. 한 과에서 두 명이나 낚다니.


(화질이 엉망이다) 이런 전단을 보고 이끌리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공강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학부는 1학년에게 시간표를 지정해준다. 학교에서 짜 준 시간표를 보고 이렇게나 여백이 많아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고등학교를 막 마치고 왔기에 수업 사이에 틈이 있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거기다가 '금 공강'은 공대에서 사실상 누리기 힘든 평화의 시간인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 같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하루나 학교를 안 온다는 것에 의아함을 품었다.


7e7d887e1dbc693bf28d06b7e542429c8adfbfb79d2eed63dd73cb36a9318b6f.jpg 1학년 1학기 시간표 - 18학점

초반에는 선구자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당시 신토익으로 바뀐다고 해서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1학년부터 빠르게 대응하는 느낌이라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거기다가 남들 PC방 갈 때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는 자기 만족감은 말할 수도 없었다. 물론 오래가지 않을 뿌듯함이었다. 결론은, 화요일처럼 공강이 점심뿐인 날은 점심 식사조차 포기하고 강의를 수강했어야 했다. 그리고 금요일은 수업 한 시간을 듣기 위해서 두 시간을 등하교에 쏟아부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최악인 것은, 방학 때도 이거 하나 들으러 학교를 왔었어야 했다.


동기와 서로 돌아가면서 포기할까 고민을 토로했다. 특히 공대와 어학교육원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여름이 다가올수록 이동 자체가 고역이었다. 매일 오르막을 오르며 그때는 흔하지 않았던 '세그웨이'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분을 구경하면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저런 거 어디서 빌려주면 좋겠다고 대화했었는데 그때 전동 킥보드 대여 시스템 창업을 했었어야 했나 보다. 다시 돌아와서, 나름대로 강사님이 본인이 지역사회 신토익 최초 만점자라고 믿고 따라오라는 이야기나, 특이한 말투로 '시원하게~' 토익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줘서 만담 듣는 기분으로 꾸역꾸역 끝까지 갔다. 물론 과정을 수료하면서 둘 다 원하는 성적도 취득하고, 환급까지 받을 수 있었던 건 '덤.' 성실함과 교내 활동에 대한 열정은 쌓을 수 있었지만, 시간을 되돌려서 같은 선택을 할 거냐고 묻는다면 되게 어려운 질문이다.


Inked20160307_155856_LI.jpg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았다.


앞선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반년 간 함께 고생을 해서 그런지 그 동기와는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수업을 듣느라 공강이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는 애매해져서 '슈가 슈가 룬' 정주행을 했는데 옆에서 미친 사람 보듯이 나를 구경하던 동기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글 쓰면서 들은 노래]

The Nights - Avicii



새터와 MT 이야기를 먼저 쓰려고 했는데, 많은 자료수집이 필요할 것 같아 조금 순서를 바꾸었다. 다음 주에 아마 학교를 벗어나려고 했던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놀러 다닌 이야기들을 잔뜩 하게 될 것 같다. 그전까지 충분한 소재가 떠오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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