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매년 아이의 여름 신발은 크록스였다. 발등이 높고 발볼이 넓은 어미를 닮아 얄상하고 예쁜 샌들은 들어가지도 않거니와 신었다 한들 여린 살이 빨갛게 짓물렀기 때문이다. 물놀이를 가더라도 미끄러지지 않고 금방 마르니 여름에 이보다 더 좋은 신발은 없다. 생각해 보니 정품은 몇 번 못 사주었다. 운 좋게 세일기간이거나 핫딜을 만나면 그 해는 크록스. 그렇지 않으면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뽀로로 스타일, 스파이더맨 스타일 같은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제품을 샀다. 정품과 가품의 가격이 같았다면 정품을 샀을 거면서 ‘뭐 똑같구만, 더 이쁘기도 하고, 발은 금방 크니까’ 등의 생각으로 더 저렴하기 때문에 산 이유를 합리화했다.
아이가 11살 되던 해 늦봄 나는 운 좋게 정품 크록스를 핫딜로 구매했다. 용케 아이의 사이즈가 있었다. 망설이다가는 품절될 것 같은 예감에 보자마자 결제 버튼을 눌렀다. 올여름 숙제는 끝이라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주소지와 사이즈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설렘 가득한 기다림의 시간. 드디어 택배가 왔다. 먼저 개봉해도 상관없지만 아들이 오면 같이 뜯고 싶었다. 살포시 택배 박스를 거실 한가운데 옮겨 두었다.
"삐삐삐 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알밤이 왔니?”
“응” 실내화 주머니와 가방이 아무렇게나 현관에 툭 던져지는 소리가 난다. 다음 행보는 안 봐도 안다.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간다. 얼마 되지 않아 물 내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오늘은 꽤 오래 참았나 보다. 그렇게 급하면 학교에서 볼 일을 보면 될 텐데, 그게 잘 안 되나 보다. 그나마 집이 학교와 가까워 다행이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에게 준비해 둔 간식을 준 후 택배 박스를 슬며시 내밀었다.
“짜잔, 이게 뭐게? 알밤이 크록스. 사이즈 맞는지 신어볼까?"
그간 아이는 주는 대로 입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1학년 공개 수업 날 입혔던 셔츠와 카디건이 하루 만에 외면당한 적이 있기는 하다.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 욕심에 기껏 그 전날 급히 아웃렛에 가서 산 셔츠와 카디건이 하루 만에 옷장 속에 묻혀 버렸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친척 형이 물려준 옷도 불만 없이 입었던 아이다.
드디어 택배 개봉. 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좀 더 채도가 높은 연두색의 크록스다. 형광기가 섞인 색상에 흠칫 놀라 아들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별 반응이 없다. 아이는 발등 높은 두꺼운 발을 크록스에 밀어 넣었다.
“안 불편해?”
“응”
아이는 새 신발에 별 반응이 없다.
“알밤아, 이따 나가서 놀 때 신어. 알밤이 발은 금방 자라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신자.”
핫딜로 산 신발이지만 온전히 한 철은 신어야 아깝지 않다는 생각에 한 마디 덧붙였다.
“삐삐삐 삑” 현관문이 열린다.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씩씩댄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다.
“엄마, 저거 안 신어.”
“알밤이, 왜 그래?”
아이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도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빠 옆에서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본 둘째가 힌트를 준다. 아까 놀이터에 오빠 반 나연이 언니가 왔다고 한다. 언니가 놀린 건 아닌데오빠신발을 빤히 보더니 개구리 같다고 했단다. 그때 오빠 얼굴이 빨개지고 울 것 같았다고...
그랬구나.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연이라면 후보가 무려 10명이었던 1학기 반장선거에서 몰표를 받다시피 당선된 그 아이 아닌가. 사교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 봐도 생글거리는 웃는 얼굴까지.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할 그 아이다. 그런 나연이가 건넨 말이라면 알밤이에게 더 묵직하게 와닿았을터. 나연이로서는 별뜻 없이 건넸을 수도 있을 말 한마디에 알밤이는 크록스 신기를 중단했다. 그놈의 연두색 크록스를 말이다.
여름내 우리집 현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던 그 개구리 크록스는 그해 겨울, 드디어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졌다. 혹시나 둘째가 찾을까 싶어 남겨둬야하냐는 고민은 일절 없었다. 언니가 개구리 같다면 그건 그냥 개구리다. 둘째에게 예쁜 언니의 말은 법이고 하늘이다. 이제 더 이상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오빠도 안 신는 신발을 굳이 꺼내어 신을 아이가 아니다. 황소개구리같다고 놀리고 말린대도 그걸 나연이 언니가 신었다면 무조건 따라 신을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이기에, 오빠가 중단한 신발은 그대로 조용히 아름다운 가게를 아름답게 빛내기 시작했다.
이후 알밤이의 여름 준비물은 검은색 크록스다. 네이비색까지는 괜찮다. 그러고 보니 올여름에는 새 크록스를 사지 않았다. 아이의 발이 다 자랐기 때문이다. 이제 새 운동화를 살지언정 닳아서 미끄러지지 않는 한 새 크록스를 사지 않아도 된다.
긴 여름 내내 가족들의 발을 편안하게 해 준 크록스를 신발장에 넣으며 아들의 11살이 생각났다. 내 품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 같았던 아이의 첫 사춘기 신호. 엄마보다 같은 반 여학생의 한 마디가 더 중요했던 볼 통통한 아들. 이후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떠올려보니 툴툴대긴 해도 엄마에게 안아 달라고 매달리던 그때가 그립다.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밀어내지 말고 더 안아줄걸 후회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