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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민정 May 27. 2019

제주의 숲은 우리의 숨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②

얼마 전 라디오 진행을 마치고 함께 일하는 작가와 점심을 먹었다. 그날 방송에선 ‘나와 맞는 숲’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사석에서의 대화도 숲으로 흘렀다. 대충, ‘제주의 많고 많은 숲 중에도 나와 맞는 숲이 있다, 나는 여기가 좋은데 너는 어디가 좋으냐, 아아 거기 참 괜찮지, 특히 이건 꼭 봐야 해’ 이런 내용이었다. 흔한 여자들의 수다였다, 거기까지는.      


“숲에 가면 마치 나무들 세상에 노크하는 기분이 돼요. ‘나 잠시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사람이 작아지는 것 같은데 그 느낌이 좋아요.”하고 작가가 숲을 닮은 눈으로 말했을 때,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성인이 되어 처음 제주에 방문했을 적 일이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모슬포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초행길에 하필 평화로엔 안개가 짙었다. 앞서가는 차량의 불빛이 겨우 헤아려질 만큼 지독한 안개, 기댈 건 내비게이션뿐이었건만 출발할 때부터 시원치가 않더니 역시나 자꾸 뒷북을 쳐댔고 설상가상 자동차 주유 등에 주황색 불이 켜졌다. 이대로 가다간 차가 퍼질지도 몰랐다. 홀로 안개 속에 갇히는 상상을 하자 아찔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음번 샛길에서 지체 없이 핸들을 꺾었다. 내려가면 마을이 나타나겠지. 주유소 하나쯤 만나지겠지.     

이윽고 나는 몹시 망연해졌다. 내리막을 따라 안개가 걷히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주유소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며 길 물을 사람 하나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오솔길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비게이션은 ‘잠시 후 오른쪽’이라는 뚱딴지같은 소릴 해댔다. 오른쪽엔 길도 없는데, 구시렁대다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 그때 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믿을 수 없게도 조수석 차 문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네 마리의 말이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길게 들이밀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럴 수 있다 셈 칠 수 있는 제주살이 5년 차지만, 당시엔 하늘이 점지한 몇몇 사람만이 겪을 법한 놀랍고 신비한 경험이라 여겨졌다. 말이 말을 거는 듯한 느낌. 말들은 얼마간 내 곁에 머물러주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들판을 걸었고 이내 숲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거긴 어디였을까? 그 날의 기억은 어젯밤 꾼 꿈처럼 아련하다. 너무나 아슴아슴해서 내가 정말 그곳에 가기는 한 걸까, 착각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경험이 내가 제주를 여행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숲에서 느꼈던 것처럼, 제주는 말들이 사는 곳, 나는 그곳을 찾은 한낱 손님이란 생각을 공고히 하게 된 것이다. 나를 낮추자 제주가 커졌다. 대지를 어머니로 비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낯선 것 천지인데, 엄마 품처럼 편안했다. 아- 이래서 도시 사람들이 제주 섬으로 숨어드는구나 깨달았다.     


슬슬 5월 연휴에 제주를 찾는다는 지인들의 소식이 들린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회색 건물 일색인 도시를 떠나 초록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도 그 너머의 최선을 종용받는 사회를 벗어나 모든 것을 품어주는 대자연 속으로, 더 많이 가져야 잘 사는 줄 알던 사람들이 손님으로 왔다가 손님으로 가는 것의 홀가분함을 느끼러 온다. 여유, 휴식, 안녕이란 말로 치환되는 시간들을 가지러 기꺼이 찾아온다.     


그러니 나무들의 세상을, 말들의 터전을 인제 그만 손대지 않고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환경보호가 상투적인 구호처럼 들린다면, 지친 영혼들이 숨어들 공간을 더는 해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게 차라리 현실적일지도. 제주의 숲은 우리의 숨일지니.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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