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 되면 노트를 펼쳐 놓고 조용히 그해의 이슈와 내년 목표를 적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송구영신을 위한 나만의 리추얼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제 영혼이 따라올 수 있게 잠시 멈춰 기다려준다는데, 그런 의미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의식을 치르려면 제단과 제물이 필요한 법, 혼자 있기 좋은 카페와 달달한 케이크는 빼놓지 않는다.
올해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카페에 갈 상황이 아닌 데다가, 노트에 딱히 적을 말이 없어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이러스로 점철될 해니까. 처음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우왕좌왕했고, 사태가 길어지자 세상은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했다. 세상에 속한 우리는 그러므로 삶의 방식을 모조리 바꾸어야 했고, 그것만 해도 벅찼다.
아무래도 생략하자, 싶었는데 딱 하나 잘했다 싶은 일이 떠올랐다. 가구 대이동. 사실 그전까지 나에게 집은 잠자는 곳이었다. 심하게 말해서 짐 보관소 같은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 비비며 노트북 들고 카페로 출근했다. 여름엔 에어컨 빵빵, 겨울엔 히터 빵빵하니 집보다 좋았다. 작업 능률도 나았다. 하루에 카페를 두 곳 이상 옮겨 다니는 것도 예사였다.
뭐든 보살펴야 반짝이는 법이다. 집을 등한시하는 동안 집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한마디로 ‘TV 앞 헤쳐모여’. 소파, 책상, 의자, 급기야 침대 매트리스까지 거실 생활자의 필요 때문에 하나둘 출현한 집기들이 거실을 죄 점령했다. 돌보지 않은 방들에선 초여름인데도 쾨쾨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밤에는 몰랐다, 구석구석 먼지가 뽀얗게 앉은지도.
꼬박 열흘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주말을 들여 집을 뒤집어엎었다. 침실에는 침대만, 거실에는 TV와 소파만, 옷방에는 옷만. 사람뿐 아니라 공간에도 정체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깨달았다. 정체성과 한 방향 정렬된 삶이 안정감을 주듯, 공간감이 실로 편안해졌다. 먼지떨이도 장만했다. 거실 월플렉스 위에 세워뒀더니 화병에 꽂힌 꽃 부럽지 않다.
부엌 맞은 편에는 조그만 작업실도 만들었다. ‘실(室)’이란 개념을 살리고 싶은데 가벽을 세우자니 답답할 것 같아서 페인트를 칠하기로 했다. X축, Y축, Z축 세 개의 면에 색을 입혔더니 입체감이 생겼다. 오프라인 만남이 어려워지면서 화상 미팅할 일이 퍽 늘었는데 배경색이 화사해 상대방도 좋아한다. 뜻밖의 효과다.
영끌해서 집 사는 시대다. 이 집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노는 공간 없이 야무지게, 내 동선과 생활과 일상에 최적화되도록 꾸며놓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세상에 속해 사는 한 어렵겠지만, 대체로 사는(buy) 만족감보다 사는(live) 기쁨을 누리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